한순간의 판단, 엇갈린 기억 속에서 무죄를 입증하기까지
모든 사건은 개인이 특정되지 않도록 각색되었고, 이를 위하여 내용 중에 허구가 가미되어 있습니다.
"변호사님, 정말 억울합니다. 분명히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제 앞에 앉은 '강민호' 씨(가명)는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최근 한 동호회 정기 모임 후 동석했던 여성 회원 '이선영' 씨(가명)로부터 준강간 혐의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선영 씨는 술에 취해 이른바 ‘블랙아웃’ 상태였고,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민호 씨는 강한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였지만, 저희는 사건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며 그의 억울함을 풀 실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1. '필름이 끊겼어요': 흔들리는 피해자 진술의 모순점
이선영 씨는 사건 당일, 동호회 회원들과 1차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이후 몇몇 회원들과 근처 지인의 오피스텔로 자리를 옮겨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오피스텔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으며, 다음 날 아침에야 자신이 강민호 씨와 원치 않는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확보한 증거들은 이선영 씨의 주장과 배치되는 정황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만찬에서의 계산: 1차 식당 CCTV에는 이선영 씨가 회원들과 함께 웃으며 대화하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계산대 앞에서 누가 계산할지를 두고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다가 직접 카드로 결제하는 모습이 명확히 찍혀 있었습니다. 기억을 잃을 정도로 만취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오피스텔까지의 이동: 식당에서 나온 후, 이선영 씨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걸어서 오피스텔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CCTV 영상 속 그녀의 걸음걸이는 비틀거림 없이 안정적이었습니다.
의식이 있던 대화: 오피스텔에 도착한 직후, 이선영 씨는 뒤늦게 합류하려던 다른 동호회 회원 '최유리' 씨(가명)와 통화를 했습니다. 통화 녹취록에서 이선영 씨는 현재 위치를 설명하고, "여기는 그냥 일반 가정집 같아. 모임 장소로는 좀 그런가?"라며 상황 판단을 하는 발언도 했습니다. 목소리나 발음 역시 비교적 명확했습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기록들은 이선영 씨가 주장하는 ‘완전한 블랙아웃’ 상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했습니다.
2. '스스로 불렀어요?': 결정적 증거, 택시 호출 앱 기록
사건의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이선영 씨가 어떻게 귀가했는지였습니다. 그녀는 오피스텔에서 나온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오피스텔 건물 1층 CCTV에는 새벽녘, 이선영 씨가 강민호 씨 및 다른 남성 회원 1명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도착했고 이선영 씨는 그 택시를 타고 떠났습니다. 택시 지붕의 ‘예약’ 표시등이 깜빡이고 있었죠.
저희는 이 ‘예약등’에 주목했습니다. 통상 택시 호출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택시를 부르면 예약등이 켜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선영 씨 명의의 휴대폰으로 택시 앱 사용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결국 그녀가 사건 당일 새벽 자신의 휴대폰으로 직접 택시 호출 앱을 사용해 집으로 가는 택시를 호출한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택시 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출발지와 목적지를 명확히 입력해야 합니다. 이는 그녀가 당시 완전한 심신상실 상태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3. '통화까지 했잖아요': 사라진 통화기록의 진실
강민호 씨는 이선영 씨가 택시를 타고 귀가할 때,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통화에서 "선영 씨, 괜찮아요? 너무 취한 것 같아서 걱정돼서 전화했어요."라고 말했고, 이선영 씨는 "괜찮아요. 거의 다 왔어요. 걱정 마세요."라며 오히려 그를 안심시키는 듯한 답변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강민호 씨가 제출한 통화기록에는 실제로 약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이선영 씨와 통화한 내역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선영 씨가 수사기관에 제출한 자신의 통화기록에는 해당 시간에 강민호 씨와의 통화 내역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통화한 기억이 없을뿐더러, 기록을 삭제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양측의 통화기록이 명백히 다른 상황에서, 그 이유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이선영 씨 진술의 신빙성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4. '그녀가 먼저 다가왔어요': 목격된 또 다른 적극성
사건 당일 오피스텔에 함께 있었던 또 다른 남성 회원 '박준서' 씨(가명)의 증언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박준서 씨는 강민호 씨와 이선영 씨가 한 방에 들어간 이후, 다른 공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이선영 씨가 그 방에서 나와 박준서 씨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고, 갑자기 입을 맞추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진술했습니다. 박준서 씨는 당황하여 그녀를 밀어냈다고 했습니다.
박준서 씨는 이 사건으로 인해 본인도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민감한 상황이었음에도, 수사기관에 자발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진술했습니다. 이는 그의 진술에 신빙성을 더했고, 이선영 씨가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주장과는 상반되는 내용이었습니다.
5.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의 일관된 태도
강민호 씨는 사건 이후에도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선영 씨가 오피스텔에서 잠시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모습을 동호회 회원 최유리 씨에게 목격당했을 때도 당황하기는 했지만 도망치거나 상황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회원과 함께 이선영 씨를 부축하여 택시에 태워 보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걱정되어 전화 통화까지 했습니다. 만약 그가 죄책감을 느꼈거나 범행을 은폐하려 했다면 보이기 어려운 행동들이었습니다.
6. 법원의 판단: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수개월에 걸친 치열한 법정 다툼 끝에, 1심 법원은 강민호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이선영 씨가 당시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사실로 보이나, △식당에서의 계산 및 정상적인 보행 모습, △오피스텔 도착 직후 최유리 씨와의 명료한 통화 내용, △스스로 택시 호출 앱을 사용하여 목적지를 설정하고 택시를 호출한 점, △귀가 중 강민호 씨와 나눈 통화 내용 등을 종합할 때, 이 사건 당시 이선영 씨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거나, 강민호 씨가 그러한 상태를 이용하여 그녀를 간음했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검찰은 항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 역시 원심의 판단을 존중하여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길고 길었던 싸움이 마침내 강민호 씨의 무죄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7. 변호인의 시선: 객관적 증거의 힘, 그리고 한순간의 무게
술자리에서의 사건, 특히 한쪽이 ‘블랙아웃’을 주장하는 경우 진실 공방은 더욱 첨예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사자의 기억에만 의존하기에는 너무나 큰 위험과 오해의 소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자칫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위기였지만, CCTV 영상, 통화 녹취, 택시 앱 사용 기록, 통화 목록 등 객관적인 ‘기록’들이 쌓이고 맞춰지면서 흔들리던 진실의 무게중심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의뢰인의 다급한 목소리 너머에 숨겨진 사실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엇갈린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객관적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변호인의 중요한 사명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한순간의 만남과 판단이 때로는 평생의 짐이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 속에서 진실을 밝히는 여정이 얼마나 치열한 노력과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지를 되새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