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대신 '설득'으로 풀어 낸 사건
모든 사건은 개인이 특정되지 않도록 각색되었고, 이를 위하여 내용 중에 허구가 가미되어 있습니다.
"변호사님, 아버지가 남기신 예금을 찾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은행에서는 모든 상속인이 동의해야만 지급할 수 있다고만 하고… 정말 답답합니다."
의뢰인 박선희(가명) 씨의 목소리에는 깊은 시름이 배어 있었습니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녀의 가족은 얼마 전 아버지를 여읜 슬픔도 잠시, 아버지가 남기신 은행 예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상속인 중 한 명인, 오래전부터 연락이 끊긴 작은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박선희 씨의 아버지(고 박철수, 가명)는 2023년 7월경 세상을 떠나시면서, 주거래 은행인 대한은행(가명)에 약 4천 8백만 원의 예금을 남기셨습니다. 법정상속인은 어머니 이영자(가명, 79세) 씨와 박선희 씨를 포함한 3남매, 그리고 연락 두절 상태인 작은아버지 박철민(가명) 씨까지 총 5명이었습니다.
가족들은 고인의 장례를 치르고 상속 재산 정리를 시작했지만, 은행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은행 측은 "내부 규정상 모든 공동상속인의 동의서나 상속재산분할협의서가 있어야만 예금 지급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수소문 끝에도 작은아버지의 행방은 묘연했고,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특히 연로하신 어머니 이영자 씨는 혹시나 남편이 남긴 돈을 영영 찾지 못하게 될까 봐 밤잠을 설치셨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선희 씨 가족은 결국 소송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속재산분할 심판 청구나 은행을 상대로 한 예금 지급 청구 소송 등이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소송은 시간과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 가족 간의 일로 법정에 서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저는 박선희 씨의 이야기를 듣고, 먼저 소송보다는 다른 해결 방법을 모색해보기로 했습니다. 우리 법원은 금전채권과 같이 나눌 수 있는 채권은 상속 개시와 동시에 법정상속분에 따라 공동상속인에게 분할되어 귀속된다고 보고 있으며, 은행이 공동상속인 전원의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정당한 상속 지분에 따른 예금 지급을 거부할 수 없다는 판례가 다수 존재했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박선희 씨를 포함한 협의 가능한 상속인들을 대리하여 대한은행 본점과 해당 지점에 "법정상속분에 기한 상속예금 반환 요청"이라는 제목의 내용증명 우편을 발송했습니다. 내용증명에는 망인의 사망 사실, 상속인들의 지위, 상속 예금의 내역과 함께 관련 법리 및 판례를 상세히 명시하여 은행의 협조를 정중히 요청했습니다.
내용증명 발송 후 며칠이 지나도 은행 측에서 뚜렷한 답변이 없자, 저는 직접 해당 은행 지점의 책임자와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담당자도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하며 난색을 표했습니다. "규정상 어쩔 수 없다", "모든 서류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고 차분히 다시 설명했습니다. "물론 은행의 내부 규정도 중요하지만, 법원의 일관된 판례는 상속인 각자가 자신의 법정상속분에 해당하는 예금에 대해서는 다른 상속인의 동의 없이도 지급을 청구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어서 "연락 두절된 상속인 한 명 때문에 80세 가까운 노모께서 정당한 상속분을 받지 못하고 애태우시는 상황이 과연 합당한지요? 은행이 모든 위험을 피하려는 자세는 이해하지만, 이로 인해 다른 상속인들이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진심으로 설득했습니다. 또한, 만약 은행이 계속 지급을 거부한다면 결국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 경우 은행은 예금 반환은 물론 지연손해금까지 부담하게 될 수 있다는 점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전달했습니다.
끈질긴 설득과 법적 근거 제시 끝에, 은행 담당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담당자는 내부적으로 재검토 후 연락을 주겠다고 답했습니다.
며칠 후, 은행으로부터 드디어 긍정적인 연락이 왔습니다. 은행 측은 내부 검토 결과, 연락 가능한 상속인들의 법정상속분에 해당하는 금액은 관련 서류(가족관계증명서, 기본증명서, 각 상속인의 인감증명서 및 신분증 등) 확인 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연락 두절된 작은아버지의 상속분은 별도로 관리하되, 나머지 상속인들의 권리 행사는 가능하도록 조치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박선희 씨 가족은 소송 없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아버지의 예금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어머니 이영자 씨는 "변호사님 덕분에 골치 아픈 소송까지 가지 않고 이렇게 해결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라며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모든 법적 분쟁이 반드시 소송을 통해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습니다. 물론 법적 절차는 최후의 보루로서 중요하지만, 그 전에 당사자 간의 충분한 소통, 합리적인 설득, 그리고 법률 전문가의 적절한 조력이 있다면 때로는 더 빠르고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도 법과 규정 뒤에는 결국 사람이 있습니다. 법률가의 역할은 단지 법정에서 날카로운 논리로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법정 밖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이끌어내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에도 있음을 되새기게 된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