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없는 달리기 대회를 만들어내다
작년부터 마라톤, 트레일러닝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며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에 놓인 적이 몇 번 있다. 출발 전 스타트라인에서 체온 유지를 위해 입는 일회용 우비, 그리고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는 사람들. 급수대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종이컵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현수막. 항상 그래 왔겠지만 이런 상황을 처음 마주한 나에게는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최근에 중국에서 열렸던 마라톤을 보러 갔는데 몇만 명이 참여한 대회인 만큼 많은 쓰레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쓰레기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기념품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아졌다. 마라톤이라고 하면 메달이 가장 대표적인 기념품일 텐데 그조차도 나에게는 쓰레기라고 느껴져서 작년에 나간 치앙마이 대회에서는 메달을 받지 않았었다(대회 신청 시에 메달을 받지 않고, 기부하는 옵션이 있었다).
이런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던 와중!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D-39 2025.02.12. : 와이퍼스 대표님으로부터 무해런의 포토존을 만들어달라는 요청
내가 일을 선택하는 가장 첫 번째 기준이 "재미"이다.
강은님 카톡을 보자마자 "이거 재밌겠다!" 싶어서 바로 하자고 했다. 작년에 와이퍼스와 함께 여의도 고구마러닝, 야간등산까지 두 번의 모임을 진행했는데 서로 교류하며 꽤 돈독한 관계가 된 듯하다!
D-30 2025.02.21. 와이퍼스 사무실에서 미팅
와이퍼스의 의진님, 희주님, 태웅님 세분과 클하 강은님, 나 이렇게 다섯 명이서 미팅을 진행했다. 포토존에 사면 트러스를 설치할 예정인데 각 면에 어떤 내용을 채우면 좋을지, 어떤 식으로 만들어낼지 등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단체에서 이번 무해런에 참여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 클하라 뿌듯하다.
D-17 2025.03.06. 포토존 제작을 도와주기로 한 클하 멤버들과 줌미팅
언제나 든든한 클하 멤버들! 포토존 제작, 설치, 행사 당일 스탭까지 도와준다는 분들이 모여주셨다. 평일, 주말 할 거 없이 바쁜 시간을 빼서 참여해 주시다니... 클하로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매력은 대체 뭘까... 비밀임... 들어오면 못 빠져 나 가거든요. 하여튼 멋진 사람들만 가득하다.
강은님이 구상한 포토존을 설명하며 준비 과정에서 어떤 재료가 필요할지, 각자 수급할 수 있는 것들 얘기도 나눴다. 포토존 구성은
1면: 사람들이 응원메시지를 적을 수 있는 빈 면
2면: 여러 슬로건이 적힌 피켓을 가득 붙인 면
3면: “쓰레기 없는 마라톤” + 무해런의 마스코트 고북이와 레티가 달리고 있는 모습
4면: “2025 무해런” + 달리는 사람
이렇게 네 면으로 구성했다.
영남에 계시는 충주까지 두 분이 큰 박스를 가져다주시기로 하셨다. 너무 감사하잖아요 진짜...
D-14 2025.03.09. 충주 베이스캠프에서 1차 제작
트러스 사이즈에 맞춰 박스를 이어 붙이고, 피켓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이 날은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에서 와주신 분도 계셨다. 큰 틀을 잡을 수 있던 날이었다. 참고로 나는 못 갔다...ㅎㅎ
D-11 2025.03.12. 와이퍼스 사무실에서 피켓 제작
사면 중 한쪽 면은 여러 슬로건을 적은 피켓을 가득 붙이기로 했다. 지난 주말에 충주에서 작업한 피켓 외에 추가로 피켓을 제작했다. 다행히 와이퍼스에서 큰 회의실을 빌려주셔서 다 같이 작업할 수 있었다. 오일파스텔로 폐박스 위에 작업을 했는데 수채화처럼 번지는 느낌이 없어 색 조절 하기가 훨씬 수월해 재밌었다. 진짜 공장처럼 피켓을 만들어냈다.
D-5 2025.03.18.-19. 충주 베이스캠프에서 2차 제작
첫 번째 면. 피켓을 어떤 식으로 배치할지 논의하고, 접히는 부분이 아닌 곳은 미리 다 붙였다.
두 번째 면. 고북이와 레티가 들어갈 곳에 배경색을 칠했다. 클하 활동하면서 페인트칠 경험이 몇 번 쌓여서 그런지 슥슥 재밌게 칠했다.
실제로 벽에 걸어도 보고 전체적인 사이즈를 보며 베캠 2차 작업에서 90% 정도를 완성했다.
그리고 작업하면서 먹은 맛있는 것들! 대장님이 오셔서 두 끼나 밥을 사주셨다. 병화님이 싸 오신 샌드위치도 너무 맛있었다!
D-1 2025.03.22. 행사장 포토존 설치
나눠져 있던 배경판들을 다 이어 붙이고, 트러스에 걸었다. 피켓들도 다 부착해서 두 면을 완벽하게 완성했다. 다음날에 트러스를 이동시켜야 해서 네 면을 다 고정할 수는 없었다. 내 몸보다 훨씬 몇 배는 큰 판을 붙이고 옮기려니 쉽지 않았지만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땀 흘리고 몸 쓰는 일은 진짜 "일"을 하는 기분이라 괜히 좋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 튼튼하게 트러스에 잘 고정이 되어 안심하며 해가 다 질 때쯤 오늘 설치는 끝!
D-day 2025.03.23. 제1회 무해런!
7시 반부터 부스 오픈이라 7시 10분쯤 행사장에 도착했다. 나름 일찍 온 줄 알았는데 이미 도착한 멤버들이 있어서 트러스는 정해진 위치에 옮겨져 있었고, 남은 할 일들을 후다닥 해치웠다. 병뚜껑과 나무젓가락으로 “쓰레기 없는 마라톤” 글자 만들기와 배경에 잘 붙이기!
응원판에 많은 분들이 한 마디씩 적고 가셨다! 네 면 다 인기가 많아서 아쥬우 뿌듯!!!!
감사하게도 뛸 기회가 생겨서 4월 19일에 있을 클린트레일 행사를 홍보하는 종이판-생각보다 홍보 효과가 있던 듯하다-을 등에 메고 달렸다.
요즘 무릎이 계속 안 좋아서 힘껏 달리지 못해 아쉽지만... 포토존 만드는 것 외에 러너로도 참여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다회용 컵 급수대 첫 경험! 전혀 불편하지 않던데요?!
무해런의 특별한 모습들
1. 재활용 물품보관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비닐봉지가 아닌 기존에 사용했던 마트 봉투 등을 활용했다. 흐음 편안하구먼!
2. 비건 도넛과 비빔밥
완주 후에 즐길 수 있는 메뉴들. 진정한 친환경 접시인 뻥튀기 위에 올려먹는 도넛이라니! 정말 훌륭하다.
그리고 두부와 채소 가득한 비빔밥. 땀 흘리고 먹는 음식은 언제나 맛있다.
3. 비건 프로틴 음료 & 아리수
다회용기에 마시는 음료들도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베가베리의 비건 프로틴 음료와 아리수! 아리수 부스에서는 아메리카노와 망고티, 자몽티가 있었다.
4. 완주 기념품과 배번호로 만든 메달
러쉬 제품은 다 사용한 후에 매장으로 빈 용기를 반납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접히는 실리콘 용기와 대나무 칫솔을 받았다. 배번호는 직접 접어서 메달로 만들 수 있다. 내가 속한 러닝크루(RCNB)의 스티커를 붙여 멋진 메달을 완성했다!
5. 다회용 컵 급수대
다른 대회에서도 자주 보고 싶은 다회용 컵 급수대. 힘써주신 자원봉사자분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6. 션님의 무대
내가 졸업한 대학교는 기독교 기반이라 6번의 채플 수업이 필수인데, 연 1회 션의 강연이 채플에 포함되어 있어 션을 3번 봐야 졸업할 수 있다는 얘기를 친구들과 웃으며 하곤 했다. 그랬던 션님을 무해런에서 또 보다니! 채플 때 신나게 들었던 션님의 공연을 이곳 무해런에서 보다니! 실제로 아는 사람도 아닌데 몇 번 봤다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포토존을 해체하느라 행사 끝나고도 행사장에 오래 남아있었는데 쓰레기가 정말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런 대회가 어디 또 있을까. 행사를 위해 만들었던 것들도 다음에 사용할 수 있도록 모두 챙겨갔다. 환경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여 진심인 대회를 만들었다. 준비하는 과정이 마냥 쉽지는 않았지만 정말 모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모든 것!
뻥튀기 접시에 도넛을 먹고, 배번호로 메달을 접고, 낭만이라면 이게 바로 낭만이다.
내년에 또 해주세요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