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 적부터 책이 좋았다. 아빠가 사주신 조립식 완구보다 아랫집 윗집 아주머니가 물려주신 동화 전집, 위인전에 마음이 뺏겼다. 이런 나를 보는 부모님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보다 빛났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한다면 분명 영재일 거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신 까닭이다. 죄송하게도 내게는 읽는 행위가 아닌, 그저 책장에 꽂힌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이 행복이었다.
초등학생부터는 주말이 되면 언니와 함께 놀이터 대신 동네 서점을 찾았다. 수많은 책 속에 있노라면, 보드라운 솜사탕 위에 누운 것처럼 달콤했다. 어린아이의 마음 밭에 평안과 행복의 꽃이 피었다. 언니도 나와 같은지, 한 시간이 넘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고르며 서로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용돈을 받으면 먹고 싶은 쭈쭈바나 떡볶이도 꾹 참고 책을 사는 우리였다. 집에 있는 책장에 새 책이 꽂히는 순간만큼은 왕자님의 사랑을 먹고 사는 백설 공주, 신데렐라도 부럽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책 사랑은 계속됐다. 경제 활동을 하니 사재기는 곧장 특기로 변했다.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장바구니에 책을 한가득 담으면, 제일 좋아하는 토마토 파스타를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하루하루 사들인 책이 배달될 때마다 엄마의 단골말이 귓가에 스쳤다.
“또 샀어? 그런데 너, 이전 책들은 다 읽고 사는 거니?”
그럴 리가요. 어릴 때의 나를 잊었다면 섭섭합니다. 말 그대로 나는 책 구매가 좋은 것뿐이라고요.
본격적으로 책 읽기를 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다. 어릴 적, 유일한 벗이 돼준 건 ‘일기’였다. 그래서인지 손톱 위에 놓인 봉숭아 꽃잎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처럼 글쓰기 매력에 빠져들었다. 책 읽기가 글쓰기에 도움 된다는 원천불변의 법칙을 나도 따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옛 버릇을 어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좋아하는 책에서, 사랑하는 독서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나는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어디서든 책을 드러냈다. 현관문을 열고 앞에 놓인 슬리퍼로 갈아신으면, 바로 옆 수납장에 다섯 권의 자기계발서와 세 권의 산문집을 만날 수 있게 했다. 몇 걸음 들어오면 내 서재가 보인다. 안쪽에는 흰색 책장이 있는데, 결혼하면서 오래된 책이나 한 번 이상 안 읽은 책은 모두 기부했다.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사람의 책장치고는 심심한 이유다.
설마 요리하는 부엌은 잠잠하겠지, 라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가로 길이 150㎝ 아일랜드 식탁에 놓인 스무 권의 책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소파 옆 작은 테이블 위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침실도 예외는 아니다. 침대 위에는 글쓰기 책이 10여 권 놓여 있고, 배게 옆에는 요즘 번갈아 가며 읽고 있는 산문집 두 권이 자릴 차지했다. 책 좀 읽는 주부로 보이고 싶어 그런 게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읽지를 않으니, 억지로라도 눈에 띄는 곳에 배치한 나름의 전략이다.
전략은 통했다. 시각으로만 즐기던 내가 변하기 시작했다. 집안 곳곳에 책이 보이니 과자를 먹듯 자꾸만 손이 갔다. 제대로 글을 쓰겠노라 다짐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을 무렵이다. 육안으로는 모르지만 조금씩 싹이 돋는 것처럼 책을 대하는 내 모습이 자라고 있었다. 이전에 책을 읽을 땐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흘리듯 눈으로 빠르게 활자를 보냈다. 책장을 접지도, 밑줄을 긋지도 않았다. 그러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기에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타인에게 책을 빌려주기라도 하면 침 묻히기 금지, 책장을 접거나 세게 넘기기 금지 등 수십 개의 금기 사항을 알려야 했다.
구체적인 변화는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귓가에 들어오는 글귀가 고스란히 맘속에 자리 잡을 때면 저자와 한층 가까워짐을 느낀다.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독서와 사랑에 빠진 나는 한 손엔 펜을 쥐어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나오면 과감히 밑줄을 긋는다. 한술 더 떠 순간의 느낌이나 아이디어가 스치면 해당 표지에 마구 적는다. 이렇게 해야 제대로 된 독서 즉, 저자가 심어 놓은 세계에 조금이나마 몸을 담근 듯하다. 때로는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전해주어 인생의 방패막이 되어 주고, 때로는 나와 비슷한 실패나 아픔을 드러내어 따스한 위로가 되어 준다. 글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독서를 했다면, 이제는 곁에 두고 싶은 연인이 됐다.
따스한 햇볕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 어느 오후, 세련되진 않지만 차분한 느낌의 옅은 회색 6인용 테이블이 놓여 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속에는 뉴욕 패션쇼가 부럽지 않을 기세등등한 책들이 꼿꼿하게 서 있다. 조금 전 함께 읽은 책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 가족. 바로, 내가 꿈꾸는 우리 집 거실 풍경이다. 좋아하는 ‘책’을 넘어, 사랑하는 ‘독서’를 만나 생긴 꿈이다. 이 여정이 있었기에 오늘도 나는 꿈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