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밥 먹자, 아빠가 불렀다.

아빠가 해준 집밥.

by han


우리 집에는 아직도 응석받이 애기가 있다. 21살에 대학생인 내 딸이다. 밖에선 똑소리 나게 행동하는 언니다, 하지만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본래의 모습인 애기로 변신한다. 특히 아빠만 보면 막무가내다. 지난봄, 서울 집에 가서 있던 일이다. 분명히 거기도 내 집임에는 틀림없는데 잠을 설쳤다. 내 집에서 내가 낯설어하는 이상한 현상이다. 그날도 새벽 4시 좀 넘어 일어나 거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딸아이가 방에서 나왔다. 전날부터 짜장면 타령을 하더니 대번 짜장면을 해달라고 했다. 기가 막혔지만,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다. 내가 그렇게 키웠으니 하는 수 없었다.


“애기야, 그건 재료가 있어야 해! 배고프면 어제 먹고 남은 불고기 데워줄까?”

“아니, 느끼해서 싫어"

"야, 느끼하긴 짜장면이나 불고기나 뭐..."

"아빤 할 수 있잖아!”


삐친 듯 입을 삐죽거리고 불쌍한 표정을 짓는데, 그 모습에 넘어가지 않을 아빠는 세상에 없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 순간 스치는 생각으론, 딸아이는 꼭 짜장면을 먹고 싶다기보다는, 여태껏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은 아빠의 솜씨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면 짜장면은 재료가 없어 불가능하고 다른 것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때야 앙큼한 딸아이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우선에 딸아이의 입맛을 만족시키려면 재료가 있어야 했다. 냉장고를 열어봤다. 모 TV 프로그램에 내가 출현한 것 같았다. 빠르게 스켄한 결과 냉동만두 하고 딸기가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난 전날 남긴 불고기가 담긴 프라이팬에 물과 약간의 간장을 추가한 다음 냉동 만두를 집어넣고 불을 올렸다. 국물이 자작해질 때쯤 느타리버섯을 넣고 좀 더 끓인 후 접시에 담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과 텁텁함을 잡아야 했다. 딸기를 썰어 접시에 함께 올리고 파인애플 소스를 듬뿍 뿌려주었다. 딸아이는 맛을 보고는 엄지척을 하고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신 아빠를 쳐다봤다.


내가 이렇게 음식을 잘하게 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어려서부터 나의 꿈은 거창하지 않았다. 단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잘못하더라도 아빠 얼굴만 보면 안심이 되고, 걱정이 있더라도 아빠와 마주하면 눈 녹듯 사라지는 그런 편안한 존재 말이다. 집이란, 건축물(house)이 아니라 가정(home)이고, 탓하고 미워하는 장소가 아니라 위로받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결혼하고 내게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아빠가 됐다. 어려서 마음먹은 데로 내 아이들을 대했다. 언제나 웃고 놀아주고 밤에는 양품에 아이들을 끼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애들 엄마가 일이 있으면 내가 밥을 해서 아이들을 챙겼다. 그러면서 아이들 입맛에 관심을 가지고 하다 보니 실력이 점차 늘었다. 아빠가 음식을 하면 아이들은 항상 기웃거렸다. 환상적인 맛을 보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특별나게 하는 것은 없다. 감자조림, 김치찌개, 무생채, 겉절이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집밥이다. 식탁에 차려놓고 ‘얘들아 밥 먹자’라고 부르면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아들은 스스로 먹고 젓가락질이 서툰 딸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밥 위에 반찬을 놓아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들이 어려서는 해주는 대로 맛있게 먹었지만, 커가면서는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고 주문을 했다. 메뉴판을 만들어도 될 지경이 됐다. 결국, 한식 위주의 집밥은 수준이 한층 높아지고 다국적이 됐다. 곱창볶음, 보쌈, 샤부샤부, 파스타 등으로 계속 번져나갔다.


세월은 참 빠르다, 아이들은 23, 21살이 되어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다시 서울로 갔다. 일 년에 두세 번 밖에 볼 수 없다. 지나고 나니 '얘들아 밥 먹자' 하고 부르던 그 시절이 꿈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이젠 아빠보다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때가 되면, 부모 스스로 자식에게서 스스로 멀어져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이들 덕분에 다양한 요리를 폼나게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대접할 수도 있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 서울 올라가면 딸아이는 또 뭔가 해달라고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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