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33년 후 나의 아들이 나에 대해서 쓴다면
-지금부터 33년 후 나의 아들이 나에 대해서 쓴다면-
인류가 화성에 첫발을 내딛고, 남북통일이 되고,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의 문화와 경제 중심지가 된 것은 놀라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내게는 그다지 놀라운 일 아니다. 난 더한 것을 봤다. 앞서 언급한 것들은, 인류가 그리고 민족이 이루고자 하는 노력하는 것을 지켜봤기에, 그 결과에 벅차게 환호하는 것뿐이다. 진정 놀라운 일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33년 전, 그날은 내가 제대하는 날이었다. 부대 근처로 데리러 온 아빠를 보고 한대 얻어맞은 듯 충격에 빠졌다. 내가 알고 있던 아빠가 아니었다. 전년도 여름휴가 나가서 봤던 모습과 그 날의 모습 사이에는 완벽한 경계가 존재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10년 전, 영양 산골로 내려오면서부터 아빠에게는 독특한 트레이드마크가 생겼다. 아무렇게나 어깨까지 흐드러지게 내려온 하얀 새치와 검정이 반반 섞인 머리칼. 까칠한 수염, 허름한 티셔츠에 작업복 바지다. 언제나 거친 모습을 하고 다녔다. 오죽하면 별명이 ‘마초’였겠는가. 가끔 20년도 넘은 낡은 화물차를 타고 청주에 있는 나와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도 방문했다. 보이는 모습 그대로,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말투는 예외가 없었다. 친구들의 부모님과는 확실히 달라 보여서 일까, 학교에 방문하면, 누구나 알아보고 무척 인기가 좋았다. 여동생 친구들은 혼자서 멧돼지도 잡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정말인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하긴, 실제로 보지 못한 멧돼지보다 아빠가 더 강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엄마가 ’ 머리 좀 깍지’라고 잔소리하면 동생과 난 아빠의 트레이드마크라면서 말릴 정도였다. 우스운 건, 밖에서 그렇게 거침없이 행동하는 아빠가 여동생과 엄마를 제일 무서워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청바지에 하늘색 남방, 선글라스, 머리를 귀가 보이게 깎고 옆머리는 젤을 발라 뒤로 슬쩍 넘겼다. 건너편 찻길, 처음 보는 SUV 승용차 옆에 서 있다가 내게 다가왔다. 가뜩이나 정신 차리기 힘든데 음악이 들렸다. 아빠의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혀있는 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지금은 흘러간 노래가 돼버린 폴 킴이란 가수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이었다. 당시엔 그 노래가 최신곡이었고 아빠 나이 때 남자들이 좋아하는 노래는 아니었다. 게다가 노래를 따라 부르고 리듬에 맞춰 팔을 부드럽게 뻗으며 걸어왔다. 흡사 오래도록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던 능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최신곡은 둘째치고 ’ 아빠가 음악을 들어? 그것도 폴 킴의 노래를? 춤은 또 뭐야? 몸매는? 촌에 헬스장이라도 생겼나? 그런데 왜 어울리지? ‘차에 타고도 머릿속은 오만가지 당혹스러운 궁금증으로 꽉 차 있었다.
영양 산골 농막에서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도 궁금증은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빠가 환호성을 질렀다. 브런치라는 인터넷 책방에 작가가 됐다는 메일을 받은 것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은 군대 있을 때 전화 통화로 이야기해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촌에 혼자 지내며 심심해서 그러나 보다 했다. 정식 작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순식간에 변해버린 외모와 더불어 이젠 작가라니, 상상력을 더 높이 끌어올렸다가는 내가 쓰러질 것 같았다.
23살 아들은 웹툰 한다고 폼 잡고 있는데, 56세 아빠가 먼저 등단했다.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생각해봐야 했다. 전에 아빠가 해준 말들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낮에는 산, 밤에는 별만 반짝이는 곳이다. 다시 서울로 가서 살고 싶다고 하자, 아빠는 10년 후엔 어차피 너희는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다, 그리고 '뭔가 이루려고 한다면, 최소한 10년은 보이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어린 나는, 우리 남매에게 말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말은 우리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한 말이었다. 그렇게 뭉뚱그려 이야기하니 당시에는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야 비로소 이해했다. 당신에게는 내가 제대하는 그날이 10년을 결산하는 시점이었다.
아빠는 오래도록 자신만의 꿈을 꾼 것이다. 농사지으면서, 몸은 땅에 있고 머리는 읽었던 책을 사유하고 있었다. 내가 군대에 가고 동생도 서울로 올라가자 조용히 앉아 습작을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가 됐다. 스스로 한계와 경계를 정해 놓지 않은 사람이었고, 한순간에 변한 게 아니라 이미 변해 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단지, 평소에 하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설마 하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눈치 못 채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변신의 귀재이자 규정지어진 사람이 아닌 것은 맞다. 더 오래전으로 돌이켜보면, 농부가 됐을 때도 그렇다. 그곳에서 평생 농사를 짓던 사람들보다 귀농한 아빠가 더 농부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작가가 된 후, 아빠는 ‘산골 소년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난 탄성을 질렀다. 어릴 적에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을 기억했다. 충분히 판타지 형식의 동화는 쓰고도 남을 것 같았다. 산골 소년이 쓴 동화라니, 멋진 생각이었다. 난 그때도 액면 가액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그렇게만 해석할 말은 아니었다. 아빠는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소년처럼 호기심 많은 맑은 눈으로 다양한 세상을 바라보고 ‘관습’ ‘세대’ ‘나이’ ‘성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울려 살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게, 그 노인네 말은 쉬우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어렵게 느껴졌다.
아빠의 기일이 가까워졌다. 매년 그렇지만, 살아있을 땐 조용하더니 죽어서 웬 난리인지 모르겠다. 유럽에서 프로리스트 작품 활동을 하는 동생과 가족도, **작가도, **화가뿐 아니라 많은 알만한 작가들이 이곳 바닷가 나의 웹툰 작업실로 온다. 모두가 돌아가신 아빠의 친구분들이다. 남자 작가들은 그럴 수도 있다지만 20살이나 차이나는 여자 작가들은 어떻게 사귀었는지 모르겠다. 재주도 참 좋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자신만의 인생을 멋지게 산 사람이고 살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가족과 자신의 꿈은 절대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아들인 나 또한 멋지게 살아야겠다.
나는 가끔, 내가 죽은 후, 나의 아이들이 생각하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무서운 상상을 해 본다. 이 글은 나의 아들이 내 나이가 돼서 이렇게 썼으면 하는 희망에 써본 것이다. 앞으로도 이 글에 걸맞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