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소나기가 내렸다
그 이글거리던 폭염은 잠깐 어디론가 숨었다.
빗물인지 이슬인지
아직 물기가 남아 반짝이는 야외 벤치에 앉아서
풀내음과 새소리에 둘러싸여
모닝커피를 마신다.
아... 좋다...
오늘은 휴가 첫날이고
여기는 양평의 한 전원주택이다.
얼마 전 아내가 자기 절친의 언니네 시골집을 빌렸다고 말했을 땐 선뜻 내키지 않았었다. 아무리 'Second House'로 쓰는 곳이라 해도 한 다리 건너 아는 가족의 사적 공간이란 사실이 부담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울과 가깝고, 아이짱(반려견)까지 데리고 갈 수 있는 프라이빗한 곳이며, 무엇보다 궁금했던 전원생활을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단 그녀의 설득에 바로 넘어가 버렸다.
일주일 여름휴가가 어제 시작되었다.
금요일 오후, 혹시나 차가 밀릴까 반차까지 내고 출발했더니 1시간이 채 안돼 이곳에 도착했다. 황순원 소나기마을 근처 개울가 옆 조용한 집이었다.
생각보다 꽤 넓은 잔디마당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차하고 짐을 옮기며 아들이 하는 말.
"우리 차가 저렇게 멋졌나?"
그러고 보니 정말 그림 같은 시골 풍경 속에 여유롭게 서 있는 모습이 1시간 전 아파트 주차장에서 빼곡히 줄 서 있을 때완 사뭇 다르다. 차도 사람도 어디에 사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원 곳곳에 귀여운 아이들 조각상들이 놓여 있고
땔감이 수북이 쌓여 있는 바베큐장,
고추와 깻잎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텃밭,
그리고 쉴 수 있는 이쁜 벤치들을 여기저기 보였다.
'주인분이 조경업을 하신다더니 역시...'
아이짱도 신났는지 연신 꼬리를 흔들며 뛰어다니고, 내 마음도 덩달아 설레기 시작했다.
집안에 들어서니
한여름 폭염에 빈집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더해 후끈했다. 창문들을 다 열고 에어컨을 세게 돌리니 좀 살 것 같았다.
거실과 부엌, 그리고 방 3개.
우리 네 식구가 이틀 밤 묵기에 충분히 넓었다.
냉장고와 창고방엔 먹고 쓸게 넉넉했다.
굿... 완벽해...
저녁은 솥뚜껑 삼겹살 파티로 정했다.
<삼시 세끼>에 나오는 장면처럼
야외 바베큐장에서 불멍을 좋아하는 아내가 불을 피우고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굽고
나는 베짱이처럼 <별이 진다네> 노래로 분위기만 돋았다.
"역시 불 맛이야"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도 엄청 먹는다.
여름밤이 깊어 간다.
문득, 태어나 어릴 때 살던 집이 떠올랐다.
녹색 양철지붕.
가운데 마루로 들어가면 정면에 안방 문지방이 보이고
좌우로 누나와 쓰던 내 방과 아버지 서재방이 있었다.
조그만 부엌과 다락, 그리고 밤에는 절대 혼자 못 갔던 야외화장실(당시 변소라 불렀다) 등등
연탄을 때던 집이라 그걸로 고기를 구웠고
선풍기 밖에 없어 한여름이면 펌프 물로 등목을 했었다.
설탕물에 가까웠던 냉커피와 바가지에 열무김치와 고추장만 넣고 쓱싹 비벼낸 찬 밥은 왜 그리 맛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없던 시절이었는데... 행복했다.
은퇴하면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볼까?
텃밭도 가꾸고
불멍도 하고
글도 쓰고
아니다.
전원주택은 아무나 사나. 돈 문제가 아니다.
하루 종일 밭 갈고 불 때고 피곤한데 글은 언제 쓰나.
어쩌다 한번 와서 먹고 노는 것 좋아하는 한량에게는
딱 여기까지다. 정신 차리자.
그래도 시인 김상용의 여유가 부럽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