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쓰이 요리코 글, 하야시 아키코 그림
"여러분의 첫 심부름을 기억하세요?"
나의 공식 첫 심부름은 아마도 예닐곱 살 무렵 이웃집에 떡을 가져다 드리고 오라는 심부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릴 적 나는 수줍음이 많아서 심부름 가는 것이 매우 싫었다. 동네 아저씨가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으앙' 울음이 나오곤 했으니 부모님도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심부름을 종종 시키곤 하셨다. 지금은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도 잘하고 강의도 거뜬하게 하면서 살아가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이야기 나눌 그림책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하야시 아키코 작가님의 그림책 [이슬이의 첫 심부름]이다. 엄마가 좋아하니 우리 아이들은 하야시 아키코의 그림책을 자주 읽었고 아이 마음을 잘 헤아리는 작가의 그림과 글은 아이들의 마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우리 오늘 어떤 책 읽을까?"
큰 아이가 골라온 여러 권의 책 중에 [이슬이의 첫 심부름]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분주한 아침 엄마는 아기를 돌보랴 요리를 하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얼마나 바쁜지 냄비와 주전자에서는 무언가가 요란하게 끓고 있고 엄마는 빵반죽을 하는 중인 듯 그림에는 반죽과 달걀이 보인다.
아기도 돌봐 달라며 울고 있다.
이때 엄마는 이슬이에게 말한다.
"이슬아, 너 혼자 심부름할 수 있겠니?"
"나 혼자?"
엄마는 우유를 사다 달라고 이슬이에게 주문한다.
엄마가 요리하는 동안 식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이슬이는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가지고 집을 나선다. 잊어버리면 안 되니 그 작은 손에 꼭 쥐고 가를 향해 걸어간다. 이슬이가 노래를 부르며 가는데 자전거가 '찌르릉찌르릉' 종을 울리며 다가왔다. 여기서 이슬이는 얼마나 놀랐는지 담벼락에 착 달라붙는다.
어른의 눈에는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이지만 작은 아이인 이슬이에게는 크고 빠르고 위협적으로 보인다. 놀란 눈을 하고 이슬이는 자전거가 지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배달 자전거가 거대한 쇳덩어리가 위협적으로 움직여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참 걸어가다가 이슬이는 친구인 영수를 만난다.
"너, 어디 가니?"
"심부름, 엄마가 우유 사 오랬어."
"혼자서?" "응" "정말?"
영수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란다.
나는 여기서 "혼자서?" "응" "정말?"이 한 줄에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이 재기 발랄한 쓰쓰이 요리코 글작가님이 글자를 이렇게 배치함으로써 영수가 놀라서 빠르게 묻고 영희가 대답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썼을까? 일본에 가게 되면 원본 동화책을 확인해 봐야겠다.
아름다운 나무들이 풍성하게 자라는 동네. 꽃집이 있고 정다운 사람들의 일상이 그림 속에 다 담겨있다. 하야시 아키코의 그림은 매우 사실적으로 일본의 주택단지가 그려져 있어 책을 보노라면 그곳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언덕 위에 가게가 있어서 이슬이는 이제 뛰어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만 꽈당, 넘어지고 만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용케 찾아서 들고 이슬이는 가게로 간다. 무릎에 상처가 났지만 울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는 구간이다.
가게에는 아무도 없다. 이슬이는 모기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말한다.
"우유 주세요."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면 눈을 깜박이며 큰 아이가 숨죽여 웃었다.
작은 아이도 형아를 보고 웃음 지으며 나를 보았다.
이제 내가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한다.
"우우--유 주세요."
'그러나 그때, 부릉부릉 지나가던 자동차 소리가 이슬이의 목소리를 삼켜버렸습니다.'라고 읽으면 큰 아이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더 크게 말해야지. 우유 주세요!!!"
가게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 등뒤에서 안경 쓴 아저씨가 담배를 달라고 한다.
아주머니가 나와서 아저씨에게 담배를 준다. 이슬이는 작아서 보이지 않는 걸까?
이번에는 뚱뚱한 아주머니가 빵을 사간다. 뚱보 아주머니는 주인아주머니와 수다도 떨다가 가버렸다.
모두가 가버리자 이슬이는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를 큰 소리로 말한다.
가슴은 쿵쾅쿵쾅
눈에서도 끔뻑끔뻑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도 어렸을 적에 심부름을 가면 딱 저 심정이었는데 정말 어쩌면 이렇게 아이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일까?
아주머니는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이슬이에게 사과했다. 이슬이는 참았던 눈물이 똑 떨어졌다.
동전 두 개를 내고 우유를 산 이슬이는 밖으로 달려 나간다.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따라와 거스름돈으로 백 원짜리 한 개를 쥐어준다. 이슬이는 동전을 꼭 쥐고 우유를 안고 집으로 달려간다. 집 앞에는 엄마가 아기를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그림책을 사랑했다.
이슬이가 작은 소리로 '우유 주세요.'를 할 때 아이들이 목소리를 보태 조금 더 큰 소리로 함께 말해주었다.
"우리 아주 큰 소리로 말해볼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은 집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림책을 다 읽고 나서는 큰 아이가 자신도 심부름을 해보겠다고 했다. 아토피로 우유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는 두유를 사 오겠다고 했고 금방 슈퍼에 가서 두유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엄마 나는 아주 큰 소리로 말했어."
"어떻게?"
아이는 두유를 들고 자랑스럽게 나에게 건네주었다.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고 흥분과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찬 얼굴이 발그레했다.
글도 그림도 아이들 눈높이로 잘 쓰인 이 그림책을 아이들이 다 자란 요즘도 나는 가끔 보며 미소 짓는다.
그림책을 펼치면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쏟아져 나오니 오늘도 나는 늦은 밤 그림책을 본다.
2025년에도 고요하고 성실하게 쓰고 꾸준히 성장하는 작가가 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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