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볼펜 플리즈
며칠 동안 진행했던 강의들은 강의 이름이 각각 달랐고 그중 한 두 개는 글쓰기였다. 모두 인원이 30명이 넘었고 한 강의는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거라 하루에 30명씩을 3반을 만나는 강의였다. 그날만 결국 10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던 셈이다.
바쁜 일정이 끝나고 오늘 쉼을 가지려고 유튜브를 켰다가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다.
나 요즘 음악 안 해. 방송인으로 전향했어
데프콘의 말이 내 귓가에 들렸다. 왼쪽 위를 보니 굿데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생각해 보면 최근에 데프콘이 방송에 많이 나오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티브이를 잘 보지 않아서 내가 몰랐을 뿐 여기저기 어떤 추임새를 넣는 것을 한 것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내가 기억하는 데프콘은 아주 오래된 모습이긴 한데 나는 못 떴어라는 노래와 래퍼들이 헤어지는 방법 같은 노래들이다. 래퍼들이 헤어지는 방법은 당시 타이틀곡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나마 조금 순화적인 표현이 많고 나머지 노래는 약간의 욕설이 포함이 되어있었다. 나는 나는 못 떴어에서 나는 못 떴어, 너는 떴어 더 떴어 좋겠네 하는 부분과 원 볼펜 플리즈.
하는 부분이 항상 좋았다. 그리고 나는 명문대가 아니라서, 살이 많은 가수라서, 선배에게 알랑방구 못 껴서 , 나는 연예인과 스캔들을 못 내서 등등 다양한 이유를 대면서 나는 못 떴어~를 낮은음으로 반복하는 게, 어쩐지 나 같아서 좋았다.
내가 좋아했던 데프콘은 가수이고, 그것도 아주 노래를 잘하는, 자기만의 색이 뚜렷한 가수였다. 그런데 방송인 데프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다. 편안하고 재밌는 아재미를 풀풀 풍기며 멘트를 친다. 그 멘트들이 물론 아 과연 데프콘 답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소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수의 대중이 좋아할 만한 멘트를 친다. 그게 좋으면서도 낯선 느낌이 있다.
'음악은 소수가 좋아하는 것으로 했는데 방송은 다수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네. '
그것을 떠올리니 최근의 내가 떠올랐다. 강의할 때의 나. 언제부턴가 그들이 좋아하는 것,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담당자가 필요한 것을 늘 1순위로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게 스스로도 불편하지 않다. 대략 이런 식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있고 내 강의를 시간에 맞춰 시작하고 끝내고 싶다. 그러나 학생들, 특히 대학생들, 특히 내 수업을 원해서 듣는 게 아닌 대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출석이다. 그럼 그들에게는 수업 전부터 수업시작해서 5분 동안은 출석이 누락되지 않도록 안내를 하고, 온라인 출석과 수기출석지 둘 다를 꼼꼼하게 챙긴다. 이게 1순위가 된다. 그리고 담당자가 강의 전 내게 강의에 대한 니즈를 전달한다. 그렇게 전달된 니즈가 혹시 “재밌게만 해주세요 강사님!” 일 경우 최대한 재밌게 강의를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학생들 니즈와 담당자 니즈가 다 채워지면 그때 마지막으로 내 니즈를 챙긴다. 내가 구성하고자 하는 대로 수업을 진행하지만 그마저도 담당자가 원하는 시간이 따로 있다면 거기에 맞춰 강의를 끝내준다.
모두의 니즈를 먼저 맞춰주고 내 니즈를 맞추는 순서대로 강의를 진행하면 대부분이 만족할 수 있는 강의가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내 니즈는 80%밖에 못 채우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창작물을 만들 때의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대중적인 것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맞춰지지 않는다. 내 고집이 꺾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편집자나 대표가 하는 의견에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창작물을 만들어낼 때 아주 개인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낸다. '요즘 누가 어떤 글을 좋아하지'라는 생각보다는 나 혼자 바다를 걷고, 멍하게 사물을 쳐다보다가 어떤 글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가내수공업이라고 해야 할까. 내 안에서 모든 창작물은 탄생한다. 그래서 내가 느끼기에 내 창작물은 아주 소수가 좋아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에세이는 그렇다. (이 글을 수많은 출판사 대표님이 싫어하실 드...)
어쩌면 이 방식을 고수하다가 테프콘이 지금은 음악을 많이 하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계속 강사로만 자리매김을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강의는 많이 불러주시니까.
그럼에도 오늘 문득 창작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바다를 걸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못 떴어 노래를 들으며, 그냥 랩, 똥텅랩 따위를 들으며 나는 이런 노래를 좋아한다. 예전의 데프콘을 좋아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내 글쓰기를 좋아해 주는 한 줌의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데프콘은 음악을 정말 그만뒀을까. 나는 글쓰기가 근본이기에 글쓰기를 그만둘 수는 없다. 모두가 좋아할 만한 글을 언젠가 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이 글쓰기에서 어렵다면 다른 부분에서 그렇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출판계는 돈이 되는 글을 고르지만 한 명의 편집자가 내 글이 마음에 들면 책은 또다시 출판될 수 있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아니 그게, 그런 것이 어딨 냐고, 맞다. 없겠지만 나다운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 나만이 쓸 수 있는 글도 생기지 않을까.
사진출처: 굿데이 유튜브 장면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