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대화를 통해 성장하기
하하하하. 호호호호. 왁자지껄.
카페 옆 테이블의 중년 남자 둘과 여자 셋의 유쾌한 대화는 끊임이 없었다. 워낙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바람에 옆자리의 나는 그만 비밀스러운 방청객이 되고 말았다. 환상의 복식조라는 말이 떠올려지는 케미였다. 대화도 '스포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경험을 했고 결혼을 했거나 이혼을 경험하기도 한 그들이어서 그런지 어떤 주제가 던져지니 토해낼 말이 참 많아 보인다.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그룹의 대화는 한 사람의 의견이 다소 탁구공처럼 튀어 올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케치를 해서 받아내는데 이것이야말로 소통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핑퐁처럼 튀는 상대의 말을 서로 받아낼 수 있는 이유는 모두가 그 '공'을 바라보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인간은 존재의 받아들여짐과 소통이 부재하면 육체적으로 배가 아무리 불러도 마음의 배가 고프다. 이는 인간의 근원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의 부재를 인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는 논리적인 정답을 여기저기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야 하는 경우가 참 많다. 하지만 거기에 잘 맞추며 열심히 살았기에 중년에 들어서면 어느새 사람들은 탈진 상태가 되어있다. 결혼에 지치고, 부모의 역할에 지치고, 사회적 책임에 지치는 등 한마디로 먹고살기에 지쳐있다. 그들은 탈출구를 찾아 동굴로 들어가기도 하고, 궤도 이탈을 하기도 하며, 산 넘고 물 건너는 순례길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 나 살기 힘들어!!" 하고 눈치 보지 않고 마음을 쏟아 내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성숙한 소통의 그룹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의식(self-conscious)이 높은 사람들을 자기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잘 지키면서 남의 마음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안다. 하지만 자의식이 없을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는 방치한 채 눈에 보이는 상대만을 책임지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서 책임을 지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은 대화 속에서도 전체를 이끌어 가려다 보니 무리하게 되고 독단적으로 흐르기도 한다. 사람은 자기 마음만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상대의 감정 변화까지 짊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결혼한 사람들 혹은 정서적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가 된 사람들은 서로의 감정이 자기 것인 양 대신 책임져 주려 안간힘을 쓴다. 이렇게 가족 간에 서로 정서가 독립되지 못해 자유롭지 못한 중년이라면 자의식이 생길 때까지 공감대가 있는 곳에서 정서의 자유로움과 자의식을 구축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최근 뒤늦게 자신을 찾아 나서는 중년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하지만 마음을 달랠 중년의 탈출구는 어떤 장소이기보다는 가족외에 공감대가 있고 신뢰 가능한 자의식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이 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도 정서가 독립되지 못한 중년은 부모나 배우자, 사회적 위치에서 책임져야 할 현실에 정서까지 묶여있기 때문에 한쪽에서 흔들리면 그 파장으로 함께 흔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의 자유함으로 모드의 전환이 쉽지 않다. 한쪽에서 흔들리는 상황이라면 가족, 소속되어 있는 직장 외의 다른 그룹 안에서 안정감을 얻고 자의식이 탄탄히 생긴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국경을 넘나드는 삶이 늘어나면서 이중국적을 갖거나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의 해외 생활을 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국적이나 혈연적 고향과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이들을 일컬어 'third coulture kid'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문화를 경험한 이들의 '다름'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인 다양성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두 개의 문화권에서 자란 이들을 경계인 (marginal man)이라고 이름 붙인 사회학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어렵게 분투한다고 (struggle) 했지만 많은 연구들을 통해서 그들은 뛰어난 창의성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됐고 인류문화의 큰 업적 중, 특히, 예술과 창작 부분, 많은 것들이 경계인에 의해서 이뤄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생소하고 이질적이어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대상이라도 예컨대 '경계인'처럼 그 존재 자체에 대해 인정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현대의 사회구조에서는 중년의 혼성 독서클럽이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전한 선진문화가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들을 칭하는 네이밍으로 본인은 '공감대우(友)'(Consensus Friends) 라고 한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성인이라면 자신을 어떻게 책임지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대상을 통해 리플렉션 해 보며 성장을 이뤄간다면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것에 힘을 얻을 수 있다.
단, 이러한 모임을 형성할 때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이 하나 있어야 한다. 함께 소통을 통해 힐링하고 싶다면 그 '공'에 집중해 보자. 스포츠를 하듯이 '공'은 하나고 그 '공'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 집중한다면 그 모임은 성공적인 양질의 소통이 가능할 것이고, 이러한 소통의 스포츠가 끝나면 힐링을 경험한 개개인은 건강한 마음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