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다정한 사람: 137번 훈련병에게

훈련소의 날시(詩): 20일 차

by 정오

훈련소의 날시(詩): 20일 차


22. 다정한 사람: 137번 훈련병에게


섬에 사는 사람들이 축구를 잘하는 이유를 들어본 적 있는가? 공을 잘 못 찼다가는 바다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진실 같은 건 염두에도 없는 이 단순 명쾌한 통찰은 다대포 출신의 훈련병 137번의 것이었다. 자기 별명이 “부산 김호랭” 또는 “다대포 에이즈”라고 말하던 친구였다. “걸리면 다 죽거든.”이라는 주석을 달아주는 친절함도 갖추고 있었다. 137번은 이 외에도 유쾌한 어록들을 많이 남겼다. 배수로 청소를 하던 날에는 쥐 시체가 발견되자 집게로 집어 옮기며 “PX(군마트)에는 쥐약 안 파나?”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우리를 웃겼다. 두 살 많은 동기가 137번이 싫어하는 행동을 일부러 하며 그를 놀릴 때, 불교 시설에서 나눠준 펜에 적힌 기도문을 펼치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37번은 천주교인이었다.


그는 자기 말마따나 바다사나이였다. 사투리 억양이 강했고 어릴 때부터 피웠다는 담배와 큰 목청 탓인지 목소리는 40대 어부처럼 걸걸했다. 두 눈은 크고 부리부리했지만 자세히 보면 예쁘다고도 할 수 있는 눈이었다. 코도 오똑하고 입매도 시원하게 좌우로 뻗어있어 이목구비만 봐서는 미남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그러나 바다 사나이다운 거친 피부와, 드러내는 강인함에 비하면 작은 170cm 정도의 체구, 체구에 비해 조금 큰 머리가 외모에 대한 칭찬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빡빡 민 머리카락 탓에 드러난 M자형 이마라인도 그를 미남보다는 거친 남자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를 외형으로 속단해선 안된다. 137번은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2000년생으로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지만 성숙한 면모를 보여줄 때가 많았다. 생활관 내부에서 미묘한 심리전이 벌어지거나 다들 예민해져 있을 때면 먼저 나서서 중재하고 분위기를 푸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나도 큰 형으로서 중재에 나설 때가 많았지만 종종 훈계조로 공격적인 말을 해 분위를 더 안 좋게 만들 때가 있었다. 137번은 나와는 정 반대로 조금 부족한 행세를 자처하며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는 재주가 있었다. 호쾌한 사나이답게 갈등을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정작 자기가 화나는 일은 쉽게 말하지 않았다. 137번의 자리는 생활관의 입구의 여닫이 문에 가려 그늘지는 구석에 있었는데 그는 화가 날 때는 그늘과 하나 되어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물론 화를 내는 때도 있었지만 처지나 대우에 대한 한탄이 주된 내용이었고 타인과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 화는 내지 않았다.

137번은 자기가 남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들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당시 훈련병들의 대부분은 대학생이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놀다가 온 사람들이었다. 137번은 마이스터고(그는 나에게 마이스터고는 공고계의 과학고라고 자기를 과시하곤 했다.)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입대했다. 전역 후의 재취업도 약속받은 상태였다. 서울에서 홀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어엿한 어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성품이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쪽은 그의 다정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다정함은 주로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드러났다.


137번은 가끔씩 창 밖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창문은 나의 침대 바로 앞에 있었기에 나는 그의 혼잣말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하루는 비가 종일 내린 날이었다. 한참 창 밖을 바라보던 137번은 “저기 전깃줄에 참새들은 비 안 맞나”하고 중얼거렸다. 자기 처지도 더 나을 것 없는 녀석이 별걸 다 걱정한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흐뭇한 웃음이었다. 창 밖의 사물들과 생명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주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은 실내에서 비라도 피하고 있으니 비 맞는 참새가 보기 안쓰러웠나 보다. 또 하루는 노을이 질 즈음의 저녁때였다. 137번은 투박한 말투로 “하늘이 참 예쁘네.” 한마디 하고는 “수고했다. OO아”하고 자기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저기로 가면 진짜 예쁘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훈련으로 쌓인 피로 탓에 창 밖을 볼 힘이 없어 그의 말투와 표정을 보며 풍경을 짐작했다. 아마도 하늘은 보랏빛으로 예쁘게 저물고 있었을 것이다.


137번은 나에게 책 추천을 부탁한 첫 훈련병이었다. 나는 쉬는 시간이면 항상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형은 책 좀 그만 읽고 사람들하고 좀 어울리소!” 하며 놀리듯 훈수를 두던 137번이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평소 책과는 담쌓았다는 그의 말과 공과 계열인 그의 성장배경을 고려하여 유현준 교수의 책 『어디서 살 것인가』를 추천해주었다. 가볍게 읽기 좋은 교양서였다. 137번은 다행히 책을 재미있어했다. 다만 책을 안 읽던 평소 버릇 탓에 절반 이상은 읽지 못했다. “형님 이거 재미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질 못해서 다 못 읽겠어요.” 하며 그는 왜인지 미안해했다. 그는 추천해 준 책을 다 못 읽어 미안해 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137번의 다정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는 아직도 많지만 마지막으로 그의 짝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137번은 중학교 때 만난 한 살 연상의 누나를 오래 짝사랑했다고 했다. 특별한 일이 없이 적당히 잘 지내다가 고백도 못해보고 중학교를 졸업했고, 지금까지 생각나지만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된 것이다. 우연히도 137번의 위층 침대를 사용하는 141번이 그 누나와 같은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 대학 동창이었다. 137번은 여전히 마음이 있는 듯 141번에게 그분의 소식을 묻고 여전히 예쁘냐고 물었다.


가장 별 것 없어 보이는 짝사랑 이야기를 굳이 한 것은 그 이야기를 듣자 비로소 137번이 나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칭찬만 해놓고 나와 닮았다는 말을 하기가 민망스럽지만 137번을 보고 있으면 어릴 때의 내 생각이 났다. 나 역시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한 경험이 있다. 사실 많다. 그중 가장 중요한 처음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을 가르치시던 여선생님이었다. 귓불 바로 아래에서 싹둑 자른 단발머리에 볼이 약간 통통하셨던, 기간제로 들어온 젊은 분이었다. 차분한 성격에 학생들을 아이들 보듯 다룰 줄 아는 여유를 갖고 계셨다. 가끔 준비해오시던 수업 중의 잔잔한 농담들을 나는 좋아했다. 선생님은 내가 2학년을 마칠 때 학교와의 계약이 끝나 전근을 가셔야 했다. 나는 당시에 읽고 있었던 책을 한 권 더 사서 감사했다는 짧은 편지와 함께 선생님께 선물했다. 이게 끝이다. 대부분의 짝사랑 이야기처럼 그렇듯 별일 없는 심심한 마무리였다. 짝사랑을 하고 그 추억을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다정함과 배려를 담은 마음의 결이 나와 137번은 많이 닮아있었다.


내 짝사랑의 기억이 137번의 이야기와 함께 떠오른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선생님께 선물했던 책은 가네코 미스즈 와 작은 새와 방울과』(소화, 2006)였다. 섬세하고 다정한 시선과 생각이 듬뿍 담겨있는 동시집이었다. 나는 137번에게 책을 추천해줄 기회가 또 생긴다면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래 시가 있는 페이지의 한 귀퉁이를 접어서.

이슬 / 가네코 미스즈(1903~1930)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냥 둡시다.

아침 뜨락 한 구석에서
꽃님이 글썽글썽 눈물 흘린 일.

혹시라도 소문이 돌아
벌님 귀에 들어간다면

잘못이라도 한 줄 알고
꿀을 돌려주러 가겠지요.

시에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살피는 조심스러운 다정함이 담겨있다. “저 참새는 비 안 맞나”라는 중얼거림이 담고 있는 다정함과 같은 것이다. 더러는 다정한 섬세함을 남의 눈치를 보는 나약함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둘은 아주 다르다. 다정한 섬세함은 상대의 입장에 나를 둘 줄 안다는 것이고, 눈치를 보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보일 지를 더 걱정하는 것이다. 눈에 닿는 것들마다 마음을 주고 그 입장에 있어보기도 하는 일은 자주 아픈 일이다. 그리고 그 아픔만큼, 모든 것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수료식을 하루 앞둔 저녁, 떠날 채비를 마친 나는 137번과 그의 구석진 자리에서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다대포의 풍경에 대해서, 그가 살아온 삶과 꿈에 대해서. 나는 그동안 그를 보며 느꼈던 좋은 점들을 말해주었다. 일찍 일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배우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 더 공부를 해보라고도 말했다. 내가 그보다 더 많이 해본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으니, 지루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137번이 잘 해내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의 다정함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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