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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 Oct 04. 2023

익숙한 음과 생소한 음의 조화

4일차

 오늘은 입소식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오늘따라 통제가 거의 없다 싶더니, 조교들과 간부들은 훈련병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입소식 준비로 바빴다. 입소식에는 교육 대장, 연대장이 참석했다. 조교나 간부들과 비교할 때 이들의 계급은 까마득히 높았다. 훈련소 이후에 자대에 가면 보통 가장 높은 직책인 대대장의 계급이 중령이다. 교육대장은 그 바로 아래인 소령, 연대장은 그보다 한 계급 위인 대령이었다. 4일차 훈련병이었던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여타 간부들에게는 오차 하나 없이 준비해야 할 큰 행사였다. 


 행사를 위해 훈련병들이 할 일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충성!”을 외치는 것, 부동자세로 오와 열을 맞추어 삼십 분 정도 서 있는 것이 다였다. 수백 명의 훈련병이 연병장에 모여 입소식을 대기하는 동안 나는 삼성에 입사한 친구가 신입사원 교육 연수를 다녀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몇 주에 걸친 기간 동안 연수에 참여하다 보면 애사심과 회사에 대한 믿음이 강해져 연수가 끝날 때쯤엔 혈관에 삼성의 파란 피가 흐른다는 농담이었다. 나는 입소식과 이후 5주간 받게 될 마냥 두렵기만 한 훈련이 나의 혈관에 뜨거운 국방색 피를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의심하며 자리에 서 있었다.


 입소식 행사에는 총기 수여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총기 수여식은 훈련소 기간 동안 사용할 총기를 받고 엄숙한 선서를 하는 행사이다. 대표로 사열대(단상)에 서는 훈련병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미리 총을 받아 들고 있었다. 군 생활 내내 듣게 될 “이것은 국민의 혈세로 보급된 국가의 재산이고, 네 몸같이 생각하고 아껴야 할 총기이다.”라는 말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내 몸과 같이 생각하라는 것은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내 몸처럼 항상 휴대하라는 말이다. 밥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화장실 갈 때, 훈련 기간에는 잠을 잘 때에도 서늘하고 단단한 쇳덩이를 껴안고 있어야 한다. 더 생각하자면 내 몸인 듯 소중하게 다루라는 비유이다. 사실 되돌아보면 내 몸을 그렇게 소중히 다뤄온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떤 비유라고 이 상황에 곧이 들리겠는가. 총의 무게는 무거운 짐, 책임, 의무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군대 가면 철든다는 말을 총을 들고 다니는 것에 빗대어 농담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마냥 농담이라고 하기엔 어깨에 걸린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입소식은 대략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생각했으나 윗분들 보시기에 흡족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소대장에게 몇 분간 잔소리를 듣고 연병장에 남아 제식 훈련을 받아야 했다. 제식 훈련이란 군인에게 절도와 규율을 익히고 통제에 신속하게 따를 수 있도록 아주 세세하게 짜인 동작 훈련이다. 차렷, 열중쉬어, 뒤로 돌아, 우향 우 등 기본적인 움직임에 대한 훈련이다. 뒤로 돌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 등이 얼마나 힘든 거라고 한참을 하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제식은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신속하게, 일사불란하게 이뤄지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뒤로 돌 때는 오른쪽 발을 뒤로 뻗어 바닥을 발 끝으로 찍고 그 점을 기준으로 빙그르르 돌아야 한다. 돌았을 때, 마지막 자세에서 양쪽 발이 앞뒤로 튀어나온 것 없이 가지런해야 성공이다. 당장 이것을 성공시키기도 처음에는 꽤나 어려운데, 구령에 맞는 타이밍까지 모두가 한 번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에) 맞추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사실 훈련소에서 하는 대부분의 훈육이 그렇듯 이것은 우리가 유달리 못해서 받는 기합이라기보다 정해진 훈련 순서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긴박감을 더하기 위해 설정한 상황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눈치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구령을 듣는 두 귀에 발 끝에 집중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군이란 이런 면에서 모두에게 평등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막사로 복귀하며 걷는 것 까지가 제식 교육의 마무리였다. 소대장으로부터 오합지졸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입대한 지 4일 차, 이제 막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남자들의 집단이 오합지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친밀감도 소속감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상급자들의 말에 따르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래도 모두들 온순하게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듯 움직였다. 다들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입소식을 마치고 오니 내가 사지에 제 발로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무를 수도 없다. 몇달 전부터 무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거창한 행사를 치르고 나니 실감이 났다. 통제 가능한 나의 일상에서 쫓겨나 각양각색의 사람이 섞인 혼돈의 공간에 발걸음을 옮겨 들어온 것이다. 배워야 하는 것은 또 어찌나 많은지! 예습하고 올 수 있었다면 모범 훈련병이 될 자신이 있는데, 맨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야 하는 곳은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밝은 조명에 찡그린 채 울며 멋모르고 시작해야 했던 나의 탄생처럼 낯선 곳에 홀몸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저명한 임상 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슨(Jordan Bernt Peterson) 은 그의 저서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혼돈’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다. 혼돈은 마냥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한 과정을 이끌어 성장의 동력이 된다는 의견이다. 당시 나는 훈련소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아 틈날때마다 읽고 있었다. "익숙한 음과 생소한 음의 조화가 음악을 가치 있게 하듯." 작가의 주장을 함축해놓은 이 문장을 나는 일기장에 옮겨 적었다.    


 혼돈의 상태를 대부분은 부정적인 상태로 인식한다. 혼돈은 일단 낯설고, 예상대로 흘러가거나 예상할 수 없는 상태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느끼기 힘든 상태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혼돈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상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혼돈의 상태에서 우리는 패닉에 빠져 부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선택과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질서 이전에 늘 혼돈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을 예로 들자면, 새로운 길을 만나면 늘 설레는 마음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이 생긴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닐까? 중간에 막혀 있어서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원래 알던 길, 질서가 명확한 길로만 다닌다면 산책은 목적지가 정해진 따분한 체험으로 변할 것이다. 낯선 혼돈의 길로 용기있는 발걸음을 옮기고,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주변을 살피며 걷다 보면 그 길은 어느날 내가 좋아하는 새로운 길이 될지도 모른다. 혼돈은 가능성이고 성장이다. 


 혼돈과 질서에 대해 생각하자니 과거 학교에서 두 개의 상반된 역할을 하는 뼈세포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났다. 두 세포의 이름은 조골세포와 파골세포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조골세포는 뼈세포를 만들고, 파골세포는 뼈세포를 부순다. 이 둘은 뼈 안에서 24시간 내내 활동하고 있어 뼈세포들은 꾸준히 파괴되고 생겨난다. 이 무의미해 보이는 혼란스러운 작업은 뼈 내부 세포들의 배치와 정렬을 복잡하게 만들어 뼈가 다양한 방면에서 오는 충격에 강하도록 만든다. 멋진 말로는 골 재형성이라고 부른다. 빠르게 꽉 채우고 단단해지고 싶은 것이 우리의 어린 욕구겠지만, 그러다간 한 개의 결 만으로 이루어진 뼈가 되어 반대쪽으로 힘이 들어오면 뚝 부러지고 말 것이다. 혼돈과 질서는 이런 모양으로, 흔들기도 바로 세우기도 하며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단 나와 우리 훈련병들이 먼저 극복해야 할 혼돈은 제식 훈련이었다. 그놈의 뒤로 돌아와 좌향 좌 우향 우를 칼박으로 해내는 것이었다. 다들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았지만, 수백명의 훈련병이 동시에 뒤로 돌아 왼쪽 군화발로 땅을 디디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어린 아이들처럼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더 이상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집단이 아니라 하나로 결집된 느낌이었다. 적응과 새로운 질서를 경험하며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배워가고 있었다. 


 낯선 만남과 낯선 상황, 혼돈의 상태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는 앞서 간 이들의 조언으로 내 안에 흘러들어 서서히 자라났다. 나의 음악에 생소한 음이 끼어들고 내가 만들어 둔 음악의 질서를 망친다 하더라도, 나는 생소한 음이 나의 음악에 조화로워질 때까지 그 음을 품고 사랑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날 옮겨 적었던 글처럼, 익숙한 음과 생소한 음의 조화가 음악을 가치 있게 한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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