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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 Oct 06. 2023

마음을 버리지 않았으면

5일차

 훈련소에 오면 이름보다 번호로 서로를 먼저 알게 된다. 중대 번호와 훈련병 번호가 달린 인조 가죽 명찰을 왼쪽 가슴에 클립으로 끼우는 것이 통성명의 시작이다. 나는 144번 이었다. 12의 제곱인 144는 기독교에서 꽤나 좋게 여겨지는 숫자였다. 


 조금씩 서로의 이름을 외워가던 입대 5일차, 133번이 집으로 갔다. 체격부터 생김새까지 유튜브 BJ로 활동하며 지상파 방송에도 몇 번 얼굴을 비춘 적 있는 '감스트'를 닮은 친구였다. 본 인에게 직접 말하면 기분 나빠할까 봐 직접 말한 적은 없다. 말투나 행동에 뭔가 어설픈 구석이 있어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는 친구였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썼고 눈이 몹시 나쁜지 렌즈 너머로 보이는 눈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선해 보이는 인상에 살집이 조금 있는 체형이 더해져 더욱 유순해 보였다.


 133번의 자리와 144번인 나의 자리는 직육면체 구조인 생활관의 끝과 끝에 있어서 대화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한주쯤 지나고 훈련소 생활에 적응하고 나면 말을 걸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갑작스럽게 짐을 싸서 훈련소를 떠났다.


 이십 대 초반 또래의 남자들이 모이면 언제나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신경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들은 남성성으로 여겨지는 호기로움, 외향성을 드러내려 노력한다. 뒷받침할만한 사연(주로 이성이나 비행에 관련된)이 있다면 자기 위치를 견고히 하기가 쉽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예측 가능한,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다 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대신 그들은 몇몇 이야기에 대한 남자다운(약간의 욕설과 농담을 포함한) 반응으로 자기의 남성성을 드러낸다.


 133번은 친구들과 어울려 피시방에 다니고, 가끔 모여서 축구를 하기도 하는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낸 훈련병들 중 하나였다. 생활관 안에서 오가는 대화에 추임새를 넣고 가끔은 대화에 참여하며 133번은 어떻게든 자신을 알리려고 애썼다. 아날로그적 취미가 있다면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혼자서 시간을 보내도 걱정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대화에 참여하고 그룹에 속해야 했다. 그러나 과장하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노력은 티가 나기 마련이고 133번은 많이 순박하고 많이 어설펐다. 나는 ‘다들 그렇게 배우는 거지.’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133번을 응원했다. 언젠가 여유를 갖춘 어른이 된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를 지켜봤다.


 자기 과시 기간이 지나면 '호기로운 남성상'의 정점에 있는 몇몇이 한 무리를 형성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각자 새로운 무리를 만든다. 멋모르는 중, 고등학교 때라면 정점에 있는 무리가 다른 무리를 대하거나 괴롭히는 일도 있겠지만 다들 성인이고 하니, 굳이 부딪힐 일을 만들지 않으며 사이좋게 지냈다. 5일간 함께 먹고 함께 며 생활하다 보니 어설픈 133도 단짝을 찾았다. 이층 침대를 함께 쓰는 아래층 친구와 대화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전만큼 과장되거나 초조해 보이지 않고 안정되어 보였다. 133번은 여전히 모두가 참여하는 대화에서 주목을 받지도,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밥 먹을 때 나서서 옆에 앉는 친구 하나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훈련소에 입소한 다음날 진행했던 신체검사 결과가 나오면서 133번은 여러 번 행정반에 불려 다녔다. 워낙 살집이 있는 133번이었기에 나는 혈압이 높게 나왔겠거니 생각했다. 나의 친구들 중에도 수축기 최고 혈압이 150 근처를 왔다 갔다 하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상황은 그보다 더 심각한 듯했다. 다 함께 교육을 받으러 다니는 동안 133번은 하루내내 자리를 비웠다. 133번의 단짝 친구 역시 새 친구, 새 무리를 찾아야 했다. 한 친구를 그리워하며 기다리기에는 너무 변화가 많은 때였다. 나 역시 강당과 강당을 옮겨 다니며 새로 배우고 적응할 일들에 치여 133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점심시간 이후 잠깐 주어진 휴식 시간에 생활관에 들어왔더니 133번이 먼저 와 있었다. “나 고혈압이랑 부정맥이 있어서 집에 가야 할 수도 있대.”우리가 들어와 잡담을 나누는 동안 자기 옷이며 얼마 안 되는 소지품을 정리하던 133번이 말했다. 집에 가는 것, 그것만큼 우리 모두가 그때 공통으로 원하는 것이 있었을까. 아예 면제인 거냐, 좋겠다, 부럽다 등의 말들이 오가는 동안 133번은 우리의 반응처럼 기쁘지는 않아 보였다.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의 133번을 보며 나는 그가 건강에 대한 걱정이 큰 것이라 생각하고 대화를 좀 나눴다. 아무래도 내가 약대를 졸업하고 온 사람이니만큼 그의 염려를 줄이고 위로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133번은 건강을 걱정하기보다 훈련소에 남아 있지 못하고 집에 돌아간 후 재입소해야 할 생각에 걱정이 많았다. 133번에게 건강문제는 큰 걱정거리가 아닌 듯했다. 혈압이 180까지 오르든, 심장이 제 리듬을 잃어버리든 통증이 없으면 자기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장난치고 떠들고, 게임을 하는 데 지장이 없다면 건강하다는 말이다.


 133번이 건강보다 걱정하던 것은 나름대로 세운 인생 계획이었다. 계획한 때에 맞추어 군대에 왔는데, 이 계획이 틀어지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훈련소 기간에 몸이 아파 완전히 군 면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꾸준한 신체검사와 적당한 처치를 받은 후 다시 입대한다. 훈련소에 있었던 며칠간을 군 복무로 인정해주긴 해도 시기를 조정해 다시 입대하는 것 자체가 복잡하고 싫은 일이다. 얼굴을 본지 고작 며칠, 대화도 거의 나눠본 적 없는 내가 그의 인생 계획까지 캐묻는 것이 옳지 않은 일 같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대화를 마무리 하고도 133번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무엇을 피해 온 것은 아닐까?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고 감정의 잔여물이 가득한 공간으로부터 몸을 피해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을까? 버리고 싶은 자기 모습이 있어 온 것은 아닐까? 누구와도 어울리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변화하고자 하는 결심으로 무겁게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을까? 133번이 가졌을지도 모를 입대의 이유를 상상하느라 오후가 금방 가버렸다. 그저 친구들과 함께 시기를 맞춰서 입대하겠다는 평범한 이유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지만, 그것 역시 사소하 무시할만 이유는 아니다. 


 저녁 일과를 마치고 생활관에 돌아왔을 때 133번은 없었다. 문 바로 옆에 위치한 그의 관물대는 텅 비었고 침대는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며칠이면 다들 잊을 빈자리에 대한 대화는 별로 오가지 않았다.


 봄에서 막 여름으로 넘어가는 5월이었다. 긴 겨울이 끝나고 생명이 움트며 화려한 희망이 가득한 봄이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앞으로 더욱 무성해지리라는 당연한 기대가 가득한 여름을 기다리는 때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인지하지 못할 뿐 마음 같지 않은 일들은 여전했다. 오히려 이런 봄에는 계절과 대비되어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한다. 


 큰 결심으로 오지에 발을 들인 한 훈련병이 오늘 집에 돌아갔다. 20대 초반의 봄과 여름 사이에 끼인 나이의 훈련병이었다. 의지와 결심에 어느 정도 무게를 달고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하려 아등바등하던 133번의 모습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그의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 마음 같지 않은 일들이 모여 그가 마음을 버리거나 의심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런 불확실성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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