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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Aug 12. 2023

오, 복숭아

밭일하던 아빠가 땀을 씻으러 계곡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예전에는 물이 가득했지만 새로운 마을이 들어서며 골짜기가 말랐다. 산의 물은 생활용수로 끌려가 갇혔다. 올해는 봄부터 장마가 길었던 덕에 계곡에 다시 물이 차올랐다. 우거진 산에선 노란 꾀꼬리가 울어댔다. 멀리서 날아온 물까치가 새벽부터 울고 밤까지 뻐꾸기가 운다. 매년 가물었던 밭에 물이 흘렀다. 철퍽대는 땅을 밟고 오이 앞으로 갔다. 오이, 토마토, 가지가 서로 얽혀 자랐다. 벌써 팔뚝처럼 자란 오이와 달리 토마토는 이제 막 푸릇하게 달렸다.   

   

밭에 복숭아가 생겼다. 올해 초 아빠가 데려온 나무였다. 수로도 갖춰지지 않은 밭에서 봄부터 이어질 가뭄을 버틸지 의문이었다. 무화과와 포도도 버티지 못하고 겨울 동안 얼거나 여름 장마 전에 메말라 버리곤 했다. 올해는 다행히 비가 내렸다. 무럭무럭 자란 잎들이 푸르게 뻗어갔다. 허벅지까지 자란 고추가 밭에 일렁였다. 가지가 부러지지 않도록 대를 세우고 끈으로 고정했다. 그동안 비가 밀짚모자 위로 툭툭 떨어졌다. 더위 탓에 우비도 잊은 채 비를 맞았다. 가까이서 물소리가 났다. 계곡에 차오른 물이 절벽에 부딪히며 콸콸 울렸다. 그 너머 산 중턱에는 조부모님의 산소가 있었다. 아빠는 잠시 산소도 들렀다 오겠다고 했다.   

  

산 일대는 조부모님이 과수원으로 관리하던 곳으로, 매년 복숭아가 뭉그러지도록 열렸다고 했다. 아빠 어릴 적엔 낮부터 그 일대를 쏘다니다 계곡에서 몸을 씻고, 해 질 녘이 되어 복숭아를 따먹었다고 했다. 입과 손에 묻은 과즙으로 단내가 진동해서 다시 계곡으로 갔다가 개구리와 헤엄쳤다고 했다. 지금은 비싸서 일 년에 몇 번 먹기도 어려운 과일이 됐지만, 그때는 손만 뻗으면 복숭아가 있었다고 어릴 적 얼굴로 말했다. 그 과수원은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다른 형제에게 맡겨졌고, 얼마 안 되어 모르는 이의 땅이 되었다. 나는 고택 액자에 담겨있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조차 오래전 기억이라 가물가물했다.

     

Y는 질색하겠지만 아빠와 닮은 점이 있었다. Y는 여름 복숭아를 좋아했다. 입이 짧아도 복숭아는 두 개씩 먹었다. 언젠가 복숭아를 가지 통째로 주겠다고 했더니 Y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Y는 어떤 음식이든 공평하게 반으로 나눴다. 콩 한쪽도 나눠먹을 사람이란 말이 어울렸다. 그런 Y가 복숭아만큼은 다섯 조각 중 한 조각을 더 먹었다. 과일케이크에서도 복숭아를 가장 먼저 먹었다.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는 생과일 대신 황도캔을 사가지고 제 그릇과 내 그릇에 담았다. Y는 제철과일을 먹을 때 계절이 느껴진다고 했다. 한밤중에도 매미가 울었다. 우리는 설탕에 조려진 과육을 조용히 삼켰다.

       

나는 복숭아를 선호하지 않았다. 맛있긴 한데 아무래도 손에 묻는 촉감과 과즙이 불편했다. 몇 년 전엔 복숭아 껍질 알레르기가 돋아 밤새 고생했다. 복숭아는 불편한 존재였다. 밭에 들어설 때마다 불쑥 자란 복숭아를 올려다봤다. 긴 잎이 가지를 감싸듯 무성해졌다. 나는 그 옆을 빙 둘러 고추밭으로 갔다. 하루는 달큰한 향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잎에서도 복숭아향이 나는 건가 싶었는데, 우거진 잎 아래 열매가 보였다. 그 뒤로 매일 몸을 바싹 숙이고 열매를 살폈다. 아직 초록빛이 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분홍빛을 띠었다. 수확 시기를 몰라 기다리는 동안 열매가 떨어졌다. 밭일 중 툭 소리에 돌아보면 복숭아가 언덕을 타고 토마토까지 굴러갔다. 떨어진 열매 중 대부분은 비에 젖어 곰팡이가 피거나 땅에 부딪혀 멍들었다.       


빗속에서 상추를 따는데 Y가 복숭아를 가져왔다. 왜 벌써 땄냐고 물으니 떨어져서 주워왔다고 했다. 백도는 Y 가방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온 Y는 복숭아를 꺼내 물로 씻었다. 복숭아 소식에 부모님도 식탁으로 모였다. 과도로 얇은 껍질을 벗겨내자 하얀 속이 드러났다. 과즙으로 촉촉하게 젖은 모습에 군침이 돌았다. Y는 백도에 칼집을 내어 조각조각 나눴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서걱 소리를 내며 씹혔다. 달콤한 맛이 목 안쪽까지 서늘하게 이어졌다. 아직 덜 익은 줄 알았던 열매는 완숙했다. 아빠는 아직 멀었다고 했지만, 내게는 이 정도가 맞았다. 나는 Y에게 하나를 더 깎아달라고 했다. Y는 투덜대면서도 복숭아를 하나 더 깎아 내게 먼저 한 조각을 줬다.     


며칠 뒤 아빠가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가지 밑에 숨어있던 과일이 드러났다. 복숭아는 기둥을 중심으로 아래에 모여 있었다. 잎에 조심스레 싸여 있던 열매로 볕이 스몄다. 유독 파랗던 잎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그 아래에는 작은 그늘이 있었다. 땡볕에도 서늘한 바람이 통해서 머위와 생강이 크게 자랐다. 지금은 그 자리에 볕이 쨍쨍했다. 민둥해진 나무와 땅을 보니 쓸쓸한 맘이 들었다. 불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시원한 기분이 들었던 건, 바람에 흔들리는 잎과 그 아래 작은 그늘 때문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제는 바닥에 닿을 듯 엎드려 열매를 살필 필요가 없어 편한데도, 불편한 맘이 들었다.     


대부분의 열매는 먹을 수 없었다. 애벌레의 서식지나 개미의 식사로 점령당해서 먹을 부분이 없었다. 선별해서 12알 정도를 수확했다. 첫 수확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얻었다. 내가 복숭아를 따는 동안 직박구리가 옆의 블루베리를 채서 달아갔다. 복숭아가 새에게 먹히지 않고 남아있던 건 잎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성한 잎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놀라운 맘으로 복숭아를 가방에 담았다. 오이와 가지, 풋고추도 담았다. 서로의 냄새가 뒤섞여 여름 밭 냄새가 났다. 짐을 정리하는 동안 아빠가 돌아왔다. 젖은 옷에서 서늘한 물내가 났다. 화창하던 하늘에 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또 비가 내릴 터였다.     


구멍이 없는 열매는 깨끗이 씻어 먹고, 벌레에 먹힌 것은 잘게 조각내어 잼으로 만들었다. 어떤 것은 구멍이 없었는데도 벌레가 있었다. 벌레가 먼저 맛본 과일은 유독 달고 맛있었다. 감나무도 익을 때쯤 까치가 오더니,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시기를 알고 찾아왔다. 내가 셈하는 동안 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손질한 복숭아를 냄비에 넣었다. 복숭아잼을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달궈진 열매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후끈하게 덥혀진 집에 달큰한 냄새가 퍼졌다. 냄비 바닥에 물이 자박하게 생길 때쯤 설탕을 넣고 과육이 뭉근해지도록 졸였다. 숟가락으로 조각을 누르고 더 잘게 부쉈다. 눅진한 향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쯤 계피를 넣고 불을 껐다. 불 앞에 있는 동안 땀이 목을 타고 흘렀다. 충분히 식히고 다음 아침이 되어서야 잼을 먹었다. 여름이 뭉근하게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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