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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Aug 17. 2023

Y와 옥수수

올해 봄, Y가 옥수수 씨앗과 모종을 사 왔다. 나는 Y의 고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밭은 야산과 맞닿아 있었다. 3년 전 바로 아랫마을이 생기기 전까지 밭으로 향하는 길조차 없는 산이었던 터라 야생동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고라니가 밭에서 뛰어다니거나 뱀이 고랑을 휘저으며 나아가는 모습을 쉽게 보곤 했다. 들쥐부터 들개까지 많은 짐승이 오갔다. 그동안 아빠가 아끼던 눈개승마나 하늘마는 우리가 발견하기도 전에 야생의 입으로 삼켜졌다. 그 많은 야생 동물 중에서도 가장 크고 위협적인 건 멧돼지였다.    

  

밭에서 야산으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멧돼지 목욕탕과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 그 일대는 멧돼지의 크기와 무게를 과시하듯 풀 한 포기 없이 움푹 파여 있었다. 나무와 수풀 사이에 가려진 진흙탕을 볼 때마다 청송의 친구가 겪었던 일화가 떠올랐다. 한밤중 부스럭 소리에 일어나면 먼 데서 과수원을 헤매는 발소리가 났다고 했다. 먼저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멧돼지가 나타났다며 친구에게 알렸고, 친구는 호기심에 창을 열었다가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나는 눈과 마주했다고 한다. 당시의 두려움이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부스럭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밭 건너 수풀이 소란스레 들썩이더니, 뭔가가 쑥 튀어나왔다. 상추를 따던 엄마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나타난 건 다행히 회색 직박구리였다. 직박구리는 삐익 소리를 내며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갔다. 우리는 한숨을 쉬며 다시 상추를 땄다. 작년에는 아빠가 옥수수와 감자를 심었다. 옥수수 모종은 쑥쑥 자라서 금방 사람 키 정도가 되었다. 아빠는 밭에 다녀올 때마다 옥수수가 얼마나 자랐는지 자랑했다. 큰 잎이나 줄기를 휴대폰에 찍어 와선 옥수수를 기대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열매가 맺히기도 전에 멧돼지의 놀이터가 되었다. 얼마나 신나게 뒹굴었는지 대가 모두 으깨져 있었다고 허탈하게 웃으셨다. 

     

Y가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종을 사 왔다. 자전거에 묶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손잡이에 봉투를 걸고 산길을 올랐다. 땀을 뚝뚝 흘리며 비탈을 오르다 아랫마을 사람과 마주쳤다. 마당을 가꾸던 아저씨는 며칠 전 밤에도 멧돼지가 인가까지 내려왔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호미로 땅을 부수는 Y에게 역시 옥수수는 무리가 아닐까,라고 물었다. Y는 계속 괜찮다고만 했다. 사실 초봄부터 Y는 옥수수를 키우려고 했다. 처음에는 씨앗을 심어서 발아시키려고 했는데, 옥수수를 좋아하는 생물이 너무 많았다. 작은 벌레는 물론, 닭장에서 나온 닭과 나무그늘에서 지켜보던 새가 Y가 옥수수를 심고 돌아서자마자 씨앗을 찾아 먹었다. 하는 수없이 Y는 모종을 사 왔다.     


처음에는 6그루였지만, 조금씩 사모아서 12그루가 되었다. 옥수수가 머리 위까지 자라는 걸 지켜보던 Y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며칠 뒤 집에 검은 모종판이 도착했다. Y는 모종판을 들고 방으로 뛰어갔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서 문을 열어보니 자신의 방에서 몰래 씨앗을 발아시키고 있었다. 총 3개의 모종판에 옥수수가 가득 찼다. Y는 매일 일어나면 옥수수에 물을 주고 베란다로 나갔다. 복잡한 살림살이를 싫어하는 엄마가 야단쳐도 Y는 매일 모종판을 들고 베란다로 나섰다. 정성을 알아본 덕인지 싹이 토끼 귀처럼 쫑긋 솟아났다. 고무나무와 극락조 그늘 아래서 옥수수는 무럭무럭 자라 바람이 불면 출렁일 정도가 되었다.       


Y는 빛이 부족한 것 같다며 실외기에 모종판을 올렸다. 그날은 개인사정으로 외출한 때였다. 아침에는 내리쬐던 빛이 오후가 될수록 흐려지다, 밤이 되자 비를 뚝뚝 흘렸다. 비는 점차 거세지더니 억세게 퍼부었다. 집에 돌아와 베란다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절반 이상의 모종이 꺾여 흐느적거렸다. Y는 여느 사람보다 의지가 강했다. 남은 모종에 영양제를 넣고 평소처럼 매일 베란다와 방을 오가며 모종을 키웠다. 모종은 한층 자라 잎을 길게 뻗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이미 시기를 놓친 것 아니냐고 묻자, Y가 가을 옥수수라고 했다. 여름에 수확하는 옥수수보다 더 빠르게 자라서 오히려 키우기 편하다고도 했다. ‘가을 옥수수’는 며칠 뒤 여름 옥수수 옆에 심겼다.      


그날은 연일 이어진 장마가 잠시 그친 때였다. 뉴스에는 홍수로 피해를 입은 농가와 도심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늘 이용하던 베랑길로 접어들자 비릿한 바다냄새가 났다. 평소 내려다봐야 보이던 강이 발치에 닿을 듯 가까웠다. 강 주변의 나무도 물아래 잠겨 우듬지만 겨우 보였다. 황토색 물이 다리를 덮칠 듯 넘실댔다. 이곳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벼랑을 올려다봤다. 역에서 밭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은 오봉산길 뿐이었다. 우리는 산길을 올라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도착한 밭에서 가장 먼저 목격한 건 쓰러진 옥수수였다. 평소 밭에 들어설 때마다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솟은 옥수수가 보였다. 어느덧 꽃이 피고 열매도 맺혀 수확을 앞둔 순간이었다. Y는 매일 밭에 올 때마다 옥수수를 살피고 사진에 담아 정리했다. Y는 곧장 옥수수로 향했다. 땅에 떨어진 옥수수에는 날카로운 이빨자국이 남아있었다. Y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주변을 탐색하다, 밭을 가로지르는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랑마다 깊게 파인 발자국은 꼭 삽으로 퍼낸 듯 크고 선명했다. 무자비한 발자국은 옥수수 바로 뒤쪽에 숨겨둔 고구마까지 이어졌다. 고구마도 멀칭을 뚫고 군데군데 뽑히고 줄기를 뜯겨 처참한 상황이었다. 일단 괜찮은 고구마 몇몇은 발로 밟아 심어 수습하고 다시 발자국을 쫓았다. 멧돼지의 흔적은 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끊겼다. 고개를 들자 짙은 수풀과 우거진 숲이 보였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산은 깊고 어두웠다. 그늘이 우거진 탓인지 입구부터 서늘한 공기가 흘렀다. 어둑한 안쪽에서 퍼득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뻐꾸기가 나타났다. 뻐꾸기 울음은 검은 산을 타고 길게 퍼졌다.      


Y는 아직 옥수수가 남았다고 했다. Y의 말대로 아직 열매가 맺히지 않은 어린 옥수수는 덮쳐지지 않았다. Y는 밭에 남겨둔 영양제를 가져와 옥수수에 뿌렸다. 내게는 고구마에 영양제를 주라고 지시했다. 나는 투덜대며 물뿌리개를 옮겼다. Y는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며칠 뒤 집에는 또 다른 물품이 배달되었다. 멧돼지 퇴치기라고 불리는 기계였다. 야생동물이 센서에 잡히면 붉은빛을 뿜으며 빽빽 울어댔다. 호기심에 켰다가 귀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 Y는 밭 입구와 옥수수 근처에 센서를 설치했다. 과연 조그만 움직임에도 금방 반응했다. Y도 처음에는 흡족해하는 듯했다.     


문제는 며칠 뒤 발생했다. 센서가 너무 민감한 탓에 밤새 경보가 울려서 닭들이 잠들지 못했다. 나는 열매가 익어가는 중이니 조금만 더 켜두자고 했지만, Y는 닭들이 걱정된다며 경보기를 껐다. 초조한 맘이 들었지만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태풍 카눈 소식이 잇달았다. 일본으로 향할 듯 보였던 태풍은 경로를 틀어 곧장 한반도로 다가왔다. 카눈이 북상하기 전부터 거센 바람이 불었다. 흐린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이 빗발치다, 갑작스레 그치길 반복했다. 어느덧 머리보다 높게 자란 옥수수가 바람에 꺾일 듯 출렁였다. 빗물은 잎을 타고 줄기로, 땅으로 폭포처럼 흘렀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우리는 밭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비바람이 불었다. 비로 창밖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예상만큼 바람이 강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초조한 맘으로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 다음 날 새벽 일찍 밭으로 향했다. 밭에는 옥수수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땅으로 쓰러져 가까이 다가서야 보였다. 처음에는 옥수수를 반대하며 절대 돕지 않겠다고 했지만, 막상 쓰러진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맘이 들었다. 나는 곧장 삽을 가져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비로 질퍽대고 진흙이 삽에 들러붙어 무거웠다. 발도 땅이 끌어당기듯 푹푹 꺼졌다. 나는 진흙을 헤치며 옥수수를 심었다. 태풍이 지나고 더위가 한풀 꺾였음에도 볕이 뜨거웠다. 모자가 달아올라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다행히 대가 꺾이지 않고 바람에 뿌리 채 쓰러져서 다시 세울 수 있었다. 땅을 파고, 뿌리를 심고, 잎의 흙을 털어냈다. 일련의 과정을 묵묵히 반복했다. 옥수수를 심고 돌아서니 기장과 고추, 여주까지 뿌리가 들썩거리고 머리가 땅에 처박혀 있었다. 나는 다시 뙤약볕 아래로 향했다. 옥수수를 심을 때처럼 묵묵히 뿌리를 밟고 흙을 퍼서 곧추 세웠다. 부러진 줄기는 잘라내고 남은 줄기는 끈으로 묶어 고정했다. 농부가 아닌 의사가 된 듯 밭을 가르고 이어 붙여 소생시키려 노력했다.     


모두 세우고 돌아서니 어느덧 해가 반쯤 졌다. 몸을 일으키자 땀으로 투명해진 티셔츠가 몸통에 철썩 달라붙었다. 내려다보니 티와 바지가 진흙과 땀으로 엉망이었다. 입술을 닦으면 혀에 짠맛이 돌았다. 고추도 옥수수도 내 뜻이 아니었지만, 모두 내 힘으로 세웠다. 흙과 잎줄기로 염색된 장갑을 벗고 물을 마셨다. 얼음물의 냉기가 목부터 위까지 내려 꽂혔다. 밭은 태풍이 오기 전처럼 하늘을 향해 똑바로 섰다. 바람에 쓰러져 다시 묶은 고추에는 아직 남은 풋고추가 튼실하게 맺혀 있었다. 옥수수에도 곧 수확할 열매가 잎사귀 사이에 움트고 있었다. 쓰러진 대를 세우고 다시 엮어낸 여주 덩굴에도, 휘청이던 토마토 줄기에도, 말라가던 오이의 잎에도 열매가 아직 떨어지지 않고 맺혀 있었다. 쏟아지는 빛을 올려보다, 몸을 닦고 밭을 내려왔다. 그날도 석양이 높은 습도를 머금고 붉게 타올랐다.     


옥수수가 바삭 소리를 내며 꺾였다. 잎에 싸여있던 옥수수가 손으로 떨어졌다. 다 익은 열매의 껍질은 좍좍 벗겨져 얼룩한 속을 드러냈다. 빈 곳 없이 꽉 차오른 알맹이가 도톨하게 만져졌다. 농약 없이도 말끔했다. 벌레를 먹은 곳도 썩은 곳도 없었다. Y는 그중 하나를 골라 계사로 갔다. 닭들은 첫 수확한 옥수수를 먹으며 뾱뾱 울었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소리였다. 모두 쓰러진 것 같던 기장도 제 힘으로 솟아올라 태풍이 오기 전처럼 곧추섰다. 어느덧 강아지풀처럼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준비를 시작했다. 밭은 다시 푸르게 일렁이고 초록 잎 아래 고추는 붉게 익어갔다. 이제 가을이 오기 전까지 부지런히 고추를 따고 말려야 했다.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냄비에 물을 끓였다. 서랍 안에 모셔뒀던 사카린을 옥수수에 뿌리고 40분이 지나 Y가 가족을 불러 모았다. 식탁 한가운데에 노란 양은 냄비가 놓였다.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습한 부엌에 뜨거운 열기가 퍼졌다. 김이 빠져나가자 냄비 아래 옥수수가 드러났다. 얇은 속껍질을 벗겨내고 한입 베어 물자 단내가 입안에 쫙 퍼졌다. 달달한 즙이 알갱이를 씹을 때마다 뻗어 나와 혀를 자극했다. Y는 기세등등하게 옥수수 하나를 더 까며 “어때? 맛있지?” 하고 물었다. 과연 의지가 강한 Y는 기어코 옥수수를 키웠다. Y는 아직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밭에 남은 작물을 떠올렸다. 풀잎은 아직 푸르게 자라는 중이었고, 매미울음도 점차 커졌다. 옥수수 하나를 반으로 쪼개 엄마와 나눴다. 여름 열기는 아직 냄비 속처럼 뜨거웠고, 나는 옥수수에 담긴 의지를 묵묵히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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