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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Aug 27. 2020

세상에 아프지 않은 상처는 없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때론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상처가 더 아플 때가 있다.


쉽게 구겨지고 가녀린 종이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그 종이에 아주 조금, 살짝만 베어도 마치 단단한 칼에 베인 것처럼 매우 아프게 느낀다. 얼마 전 누군가의 트윗 인용글에서 보니 종이는 단면이 당히 거칠어 톱처럼 상처를 심하게 낸다는 것이다. 결국 얼마나 다쳤느냐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양과 크기보다는 그것이 얼마만큼 치명적이었느냐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만 해도... 따끔하다..



그러니 누군가 아프다고 말하면 상처의 정도를 가늠하기 전에 먼저 그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봐줘야 한다. 함께 살피고, 함께 이해하고, 많이 아팠겠구나 공감해줘야 한다. 만약 우리가 상처를 진단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낫기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지를 계산하기 위함이지, 고통 그 자체를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까짓 게 뭘 아프다고 그래"

"네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야"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아니 그 사람이 되어보면 더욱 해서는 안 될 말인데 이상하게도 상처 받아 본 사람일수록 상처 주는 말을 더 잘하는 경우도 꽤 된다. 그들은 가슴속에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고 견디며 살아오느라 어느덧 아픔에 무뎌졌는지도 모다.





가급적 안 아프고 싶은 게 사람 마음지만, 이 상처라는 것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좋 것도 아다.


일전에 <의사 요한>이라는 드라마에서 '무통각증'이 소재로 다뤄졌다고 다. 무통각증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의 피곤함, 허기, 배설 본능, 성욕 등은 정상인과 같이 느끼지만 고통, 뜨거움, 차가움과 같은 감각은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출처: 위키백과]. 아프지 않으면 언뜻 좋을 것 같지만, 몸의 어딘가가 심각하게 다쳐도, 병에 걸려 고열이 나도, 꽁꽁 얼 정도로 추워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제 때에 알고 치료기가 려워 생명에는 위협이 된다. 오히려 더 면밀히 자신을 관찰하고 챙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픈 것은 결국 낫기 위한 것이다.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괜찮아지기 위함이다.


몸의 상처뿐 아니라 마음도 상처에 대해 고통을 억압하면, 당장 아픈 것은 느끼지 않게 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치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 때에 치유되지 못하면 곪아 터져서 더 큰 고통이 올뿐이다.


르델 바르데츠키는 마음 상함을 '마음 따귀를 맞은 일'로 비유하였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얼마나 얼얼하 아플까. 디서 비롯되었든 누군가의 어떤 상처도, 어떤 아픔도 겉으로 흘깃 보고 속단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설령 아프지 않다고 해도 상처가 없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상처는 본질적으로 아프다. 그리고 리는 상처를 치유하면서 보다 튼튼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보통의 많은 우리들에게는 진심을 담은 관심과 재촉하지 않는 느린 응원이 필요할 따름이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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