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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Oct 15. 2020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아

참 어려운 양가감정




어렸을 때 학대를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나는 이런 내담자들에게 부모를 사랑할 만큼 내가 강해졌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설명한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사람을 정말 좋아하지 않고 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잘 생각해 보자.
부모는 우리가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새로 만난 사람이라면 별로 호감이 가지 않거나 심지어는 싫어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호불호는 별개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생각의 지각 변동을 거치지 않으면 어린 시절에 받지 못한 사랑을 부모에게 갈구하고 실망하고 미워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면서 나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 다미 샤르프 <당신의 어린 시절이 울고 있다> p209 좋아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




* 드라마 <최고의 이혼> 중에서 한 장면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아"


이 말을 제일 처음 접한 건, <최고의 이혼>이라는 드라마의 리뷰 기사에서였다. 그 작품을 보지는 않았지만 모바일 페이지를 넘기던 중에 너무나 눈길을 끌던 대사였다.

드라마는 부부였던 남녀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지만 또 서로 맞지 않는 점들로 상처를 받고 아프게 된 관계를 그리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결이 같다고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모순적이면서도 많은 의미가 함축된 그 문장을 한참 곱씹어보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든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든 사랑이란 이토록 복잡 미묘한 것이었던가..

아니, 비록 사랑은 순수한 것일지라도 '관계'를 이루는 데에는 사랑 외에 수많은 감정들이 함께 오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인 것 같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모님이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인 감정만 가질 수만은 없으며 오히려 끔찍하게 싫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라도 싫어 죽겠는 면이 너무나 커서 함께 사는 게 더 괴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괴롭지도 않을텐데...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은 얼핏 숭고하고 아름답기만 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슬쩍 조각내어 보면 그 속에는 상대의 모든 것이 좋지만은 않은, 싫거나 미운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정상적인 모순을 '양가감정'이라 말한다.






"그래도 아빠가 그렇게 늘 나쁘기만 하셨던 건 아니에요."


심리상담을 다 보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부모님과의 한 맺힌 일을 털어놓다가

말미에는 왠지 꼭 변호를 하게 되었다.


"그때는 집이 워낙 힘든 상황이라 그러신 것 같아요."
"제가 말도 안 듣고 힘들게 했으니까 뭐..."
"그래도 제가 고등학교 때 야자 끝나고 집에 올 때 정류장까지 매일 같이 데리러 나와주셨어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때 아빠와 얘기를 하면서 조금 친해진 것 같아요."


꼭 그렇게 나쁜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닌데,

내가 잘못한 것들도 많았는데,

부모님만 나빴던 것처럼 말하면 꼭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학대 수준의 일을 겪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너무 가난하게 살면서 힘들었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서 상처를 좀 받은 것뿐이니까.

겨우 그런 걸 가지고..

어렵사리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원망을 품다니..


수습하려 서두르는 나의 말을 듣던 상담 선생님께서는

나직하게 한 마디 해주셨다.

"오후 씨는 아까 아버지가 싫다고 했었는데 

지금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아버지를 또 좋아하기도 하네요."


순간 멍....
기법으로 따지자면 복잡할 것도 없이 초기 단계의 반영일 뿐인데 양가감정을 제대로 짚으신 것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아빠를 동시에 긍정적으로 변호하는 마음을 놓고 <좋아한다>고 하는 표현 너무 놀랐다.


무능하게 우릴 고생만 시키는 아빠를 나는 원망하고 또 원망하면서..

쉽게 짜증내고 혼내고 대화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아빠 싫은 마음뿐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미워해서는 안 될 대상인 부모님을 미워하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며 살았는데..
아버지를 좋아하기도 한다는 낯설고 짧은 그 단어에 충격이 와서 말을 버벅대면서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훅 들어온 그 문장을 처리하느라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의미 있는 침묵이 흘렀다.


'내가 아빠를 싫어하기만 한 건 아니었구나..
좋아하면서 미워할 수도 있구나..

좋아해도 되는구나...'

그래도 아빠니까. 그래도 잘 지내고 싶고 때로 잘해드리고 싶기도 하고 감사하고 아끼기도 하는 그 마음이 분명 늘 같이 있었는데, 내내 모르고 살다가 그 말씀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상반되는 두 단어를 붙여놓고 생각하니 처음엔 굉장 어색했지만..

왠지 안도감이 들고,

오히려 마음이 명쾌해졌다.


내가 아빠를 좋아한다라?


실은 아빠가 완전히 나쁜 사람이라서 미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나쁜 아빠에게 핍박받는 불쌍한 아이라야 내 감정이 정당화되니까. 그나마 내가 좀 좋은 아이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럴수록 아빠에게도 좋은 면이 있는 걸 자꾸만 변호하게 된다..

차라리 맘껏 미워하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 하고..

말을 하면서도 그 순간이 너무나 두렵고 견디기 힘들다. 이러다가 '역시 네가 나쁜 아이 맞는데 뭘..' 하고 질타받을 것만 같아서. 아무리 스스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도 그것을 굳이 증명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변호하는 이유는..
아빠를 미워하 감정을 드러내면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덜고자 결국 나를 나쁜 아이로 만드는 심리적 게임 때문이었다. 이러한 게임은 상대를 전적으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클 때 벌어진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너무 아파서 차라리 나를 미워하고 마는 것이다.


다행히 상담 선생님은 노련하게도 그 게임에 빠지지 않으셨고,
기저에 있는 마음들을 읽어주어 나를 평생 가두고 있던 이분법에서 구출해주셨다.
덕분에 그 날 이후 나의 세상에는 더 이상 '좋은 부모와 나쁜 아이(혹은 나쁜 부모와 좋은 아이)'를 나누는 공식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사랑하면서 밉기도 한 보통의 부모님과 그런 부모님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보통의 아이가 대신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두 마음이 다 있구나.
그래서 혼란스러웠구나.
우리 가족에 대한 내 마음은 정상이었어.
내가 못돼 쳐 먹어서 그렇게 고마운 줄도 모르고 원망한 게 아니었어.





사람 마음이 참 그렇다.


나도 상담하면서 내담자들의 반응을 보면 

과거의 일을 별 것 아닌 양 축소해서 이해해주려 하는 아이의 마음이나,

그렇게 사람 같지 않은 부모임에도 어머니라서 아버지라서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여서 너무나 속상한 순간들이 있다.


우리가 자신을 짓누르는 초자아를 밀어내고 부모로부터 받은 비판의 목소리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건 그렇게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 켠에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애증이 얽히고설켜있기 때문에 마냥 미워하며 잘라내듯 분리하기가 어려운 것이겠지..


심리상담이 받으면 받을수록 길어지고, 문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어릴 적 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수많은 밑 작업이 수반되어야 하는 이유가 다 이 때문인 듯하다.


대신 그만큼 부모에 대한 양가감정 문제를 풀고 나면 나머지 마음 문제는 보다 수월하게 해결되는 것 같다.

내 경우 오히려 그동안 풀 길 없던 분노가 누그러들었다 해야 할까. 속으로 아빠를 미워하면서 가진 죄책감을 덜고 그 자리에 다른 감정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엄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보았고, 이후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감정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바뀌어 갔다.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아"

"좋아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대하는 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꼭 좋고 맘에 들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이기에 사랑하는 것이지... 자신에 대한 사랑도 전적으로 그러할 필요는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다.




*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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