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친구들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모임에 아이가 있는 친구도 있고, 결혼 안 한 친구도 있었는데 아무튼 어린이집 이야기가 나왔다. 좋은 어린이집을 찾기가 어렵다는 한탄 속에서 친구들이 나보고 어이없게도그랬다.
"네가 어린이집 하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읭? 나 말이야? 내가 딸한테 화내는 걸 너희들이 못 봐서 그래!
(속으로) 상담 공부하니깐 그렇게 보이나? 얘들이 날 너무 좋게 보네. 너희가 아직도 날 모르는구나.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모르지?!
어려서부터 늘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나는 역시 구제불능의나쁜 사람인 것 같다는죄책감이 있었다.초자아의 과도한 불안이다.딱히 기준도 없고 대중도 없이 엄격하다.
예전에 학교에서 선행상 같은 걸 받기라도 하면 마음이 내내 괴로웠다. 이건 내가 받을 게 아닌데 진짜 받을만한 누군가의 것을 내가 빼앗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희들은 나를 하나도 모르는구나. 난 나쁜 사람이야, 얘들아. 집에서 맨날 화내고 싸워. 짜증만 부리고 불만도 많아. 쭈뼛거리기만 하지, 제대로 누굴 도와준 적도 없어.
그리고 정말로 나쁜 짓도 많이 했어. 누굴 괴롭힐 때도 있었고, 나서야 할 때 모른 척 가만히 있고, 때론 아닌 척 거짓말도 했어. 이런 내가 뭐가 착하니.'
심리적인 현상 중에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이란 것이 있다. 가면 증후군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남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뛰어나지 않다고 느끼고,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면 곧 실망하게 될 것이라 믿는 증상을 가리킨다. 마치 스스로를 사기꾼처럼 느끼는 것이다.
자라면서 나는 나의 부족하고 잘못된 점만을 바라보고 질책했다. 간혹 칭찬을 듣더라도 믿을 수가 없었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에는 사고방식이 상당히 이분법적이어서 사람들에게 착하고 유능하고 좋은 나, 또는 이기적이고 엉망인나쁜 나, 둘 중의 하나만 있다고 생각했다. 태생적으로 비관적이었던 나는 그중 <나쁜 나>에 대한 죄책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좋은 나>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지 못했다. 시선은 언제나 나를 보지 못 하고 주위를 향해 있어, 못난 자신과 유능해 보이는 타인을 비교하며 동경하고 심지어 시기했다. 극명한 대비 속에 자신감은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
다행히 개인상담을 몇 차례 받으며 오랫동안 잘못되었다 느껴온 나의 욕구를 괜찮은 것으로 인정받는 경험을하게 되었다. 나의 감정을 수용받은 덕분에 그렇게 느끼는 '나쁜 나'를 다르게 바라볼수 있게 되었다. 초자아의 비판이 잠시 누그러진 틈을 타서 마음속에 자리를 만들고 '좋은 나'를 다시 받아들여조금씩 키워나갔다.아주 조금씩이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천천히..
집단상담에 참가했을 때는 내가 타인을 생각만큼 불편하게 하거나 해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의외로 나의 눈물이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좋은 나와 나쁜 나의 공존으로 인해 나는 더욱 강해졌고,
삶은 보다 부드러워졌다.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이제 내가 친구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걸이해할 수 있다. 친구들이 좋으니까 배려하면서 착하게 행동해왔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좋은 면'을 인정받은 것이기분 좋기도 하다.
사실 친구들이 그렇게 나를 모르지는 않는다. 잘 맞는 친구들이라 서로 싸울 일이 없었으니 내가 화내는 모습을 모를 수는 있지만, 십 년 넘게 보면서 우린 서로 이해 가능한 사이다.
그렇지만 분명 내가 나쁜 친구, 부족한 친구가 되는 순간도있을 터..완벽하지 않아도 난 그녀들이 너무 좋은 것처럼,친구들도 완벽하지 않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줄 것이란 걸 믿는다.결점을 허용하는 관계가 더욱 견고한 사이임을 느낀다.
사람들에게 가끔은 내가 따뜻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제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단지 '어색한' 기분을 견뎌본다. 난 아마 차가운 사람이지만 '따뜻한 면'이 있을 수도 있다고일부를 긍정해준다. 세상에 단 하나의 수식어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매사 좋기만 한 사람도 매사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다.한 사람 안에는 여러 부분들이 모순적으로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