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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Aug 20. 2020

왜 그 문제는 지겹도록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

feat. 자이가르닉 효과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몇몇 친구들이 교실에 장난감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아마 여자 아이들은 예쁜 캐릭터 색칠공부나 스티커 같은 것을 가져와서 관심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침 입학하면서 이사를 해서 아는 친구가 하나도 없던 터라, 딸아이도 친구 사귈 겸 색칠공부를 하나 들고 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 날 아침 학교로 데려다주는 길에 아이가 나에게 심각하게 물었다.


"엄마, 그런데 애들이 아무도 이걸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다들 관심 없어하면 어떻게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더 쿵 내려앉다. 예전 학교 다닐 때 겪었던 아픔이 올라와서였다. 친구 사귀는 걸 너무나 어려워했고 그래서 혼자 있어야만 했던 많은 시간들이... 아이가 커가면서 이상하게도 지나간 슬픈 기억이 자꾸만 되살아난다.

아이가 단짝 친구와 멀어져서 힘들어할 때, 내가 더 괴로워서 그런 일로 왜 우냐며 다그치고 화를 내기도 했고... 동생 질투로 힘들어하는 첫째를 보면, 동생을 제치고서 내가 엄마와 함께 자고 싶었던 그 옛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욱신욱신. 과거의 일들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이제 잊어버리고 싶은데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것이 아직 끝맺음되지 않고 여전히 마음속으로 진행 중인 문제여서 그럴 수도 있다. 심리학에서는 완결되지 않은 일이 오히려 더 잘 기억나는 현상을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한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러시아의 심리학자 자이가르닉 브루마에 의해 발견된 현상으로, 사람들은 업무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는 업무와 관련하여 원활하게 기억하는 반면 업무를 완성한 상태에서는 그 일과 관련된 것들을 망각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그래서일까. 어쩐지 한 번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여간해서는 욕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되고, 다 읽은 책은 금세 잊어버리면서도 읽다 만 책은 '어서 읽어야 하는데' 하며 가시처럼 걸려있다. 따끔따끔. 우리를 자극한다.

별 탈 없이 마무리된 하루는 그대로 잊히지만, 황당한 일을 당하고도 대꾸조차 하지 못한 억울한 하루는 오랫동안 그 감정이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제대로 갚아주고 끝내야 했다며 계속 반하거나, 비슷한 다른 상황에서 과도하게 부적응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즉 과거의 어떤 사건이 마음에 충격을 일으켰을 때 그 충격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남겨놓게 되면, 우리는 괴롭게도 그 사건을 더욱 오래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이 오면 고통이 반복된다.


왜냐면 이번에는 해결하고 싶기 때문에...

상처 받은 마음을 아물게 하고 싶기 때문에...



그것이 꼭 커다란 사건(big trauma)이 아니더라도, 마치 아쉽게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평생 잊을 수 없듯 작은 사건들(small trauma) 역시 제대로 끝맺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심리치료 이론 중 하나인 게슈탈트 이론에서는 이처럼 해결되지 않고 마음속에 쌓여있는 사건들을 '미해결과제'라고 부른다.


미해결과제 (Unfinished Business)

완결되지 않은 게슈탈트인 '미해결과제'는 배경으로 물러나지 못한 채 중간층에 머물면서 계속 전경으로 떠오르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게슈탈트를 형성하는 것을 방해한다.

앞의 어린이가 오빠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속상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했는데, 엄마가 잘 들어주지 않고 무시했다면, 아이는 엄마에게 이해받지 못한 마음이 미해결과제로 남아 이것이 해결될 때까지 다른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 (...) '자기 구조'가 아직 공고해지지 않은 아동기에 양육자로부터 반복적으로 거부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만성적인 미해결과제가 쌓이게 되어 부적응을 초래한다.

펄스는 미해결과제를 찾기 위해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의 창고 깊숙이 박혀 있는 과거사를 파헤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은 지금-여기(here and now)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 즉, 미해결과제는 끊임없이 전경으로 떠오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항상 지금-여기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개체는 단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 출처 : 게슈탈트 심리치료 -창조적 삶과 성장- 2판 (김정규 저, 학지사)


이를테면 어려서 애착 형성에 문제를 겪은 사람은 크면서 불안정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대인관계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치사람들과의 연결 채우려 하거나 혹은 더 이상 불안감을 느끼지 않으려 관계를 아예 닫아둘 수도 있다. 그 사건은 과거에 이미 물리적으로 끝나버렸지만, 마음속에서 여전히 끝나지 않고 현재 매일 겪는 일상 속에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과거로 되돌아가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다행히 우리는 당장 일어나는 현재의 선택을 바꿀 수는 있다.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 속에 머무르면서 이제라도 충분히 애도하여 그 감정이 해소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 미해결되었던 게슈탈트는 완결된다. 고통스럽게 놓지 못했던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게슈탈트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완결 짓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성장하고 싶은 욕구도 많은 존재이다. 문제를 딛고 넘어서려는 마음이 수시로 차오른다. 고통 없이 더 나은 삶,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과거의 고통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지나간 괴로운 일이 자꾸 떠오른다면, 내가 잘못되었다거나 비정상이라고 여기기보다는

'내 마음이 그 문제를 해결하고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 하는구나'

'앞으로 나아 싶은 거구나'라고 알아주면 된다.


충분히 마음을 살피고, 지금 이 순간을 잘 꾸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은 언제나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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