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각화 Apr 18. 2024

아득한 어둠 속 그 안에서도 꽃은 피어난다-11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는 신호 _정리되어 가는 인간관계

살아가며 계속 긴장을 하고 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 상당히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다. 그렇다고 긴장이 아예 없는 상태로 사는 것 또한 마냥 행복한 삶은 아니겠지만...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삶의 탄력을 잃어버릴 만큼이 아닌 적당한 긴장감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자연이 거저 주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마음가짐, 하루하루 사랑하는 이들의 안녕을 둘러볼 수 있는 만큼의 마음의 여유로움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정도만으로도 행복하다 생각하며, 이 시간들이 이어짐이 진정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한 감사함을 갖게 한 데에는 정 반대의 생각으로 지나간 암울한 시간들이 있었다.


폭풍이라면 폭풍이고 어둠이라면 어둠인 시간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 그 시험의 시간들 속에 처음엔 하늘을 탓했고, 절망했으며,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현실을 직시하는 눈으로 돌아보며 정신을 차리곤, '이것이 바닥이야 딛고 일어서!'라는 말을 되내며 틈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한 걸음씩 걸어 나가면, 그 빛은 늘 내 곁에 머물고 있던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퍼져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마음을 놓게 된 시간

큰아이가 뇌수술을 하고 안정기에 들어갔다고 보는 시점은 수술 후 5년이었다. 항암을 받으시는 분들이 완치판정받는 시간과 유사하게 보신다고 했는데, 다만 모야모야병은 완치라는 개념이 없어 5년 동안 다른 증상 없이 유지가 된다면 85% 정상인으로 보고 그만큼의 일상생활은 해도 좋다고 하셨다. 5년 동안은 체육 활동, 노래, 입으로 부는 악기,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사람 많은 곳, 놀이기구 등등 모든 것에 제한이 따랐다.


'다른 것 다 필요 없다... 건강하게만 살아다오'라는 세상 가장 큰 욕심과 바람으로 그 시간들을 지났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앞선 글에 기록했듯, 고등학교에서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해 주신 선생님을 만났을 때 조금은 기대도 하게 되었고, 과연 나의 아이가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로 잘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반 기대반의 시간들이 흘러갔다.


고2 때까지는, 선생님이 이끌어주신 생각들로 미술교육과를 고려하기도 했는데, 입시준비를 위해 찾아갔던 학원에서 아이의 그동안 작품들을 보시며 애니나 게임디자인에 특화된 그림이라는 말씀과 미교과를 갈 만큼의 내신을 쌓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점, 여러 상황들을 고려한 끝에 고3 진로결정을 게임디자인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아이 스스로 선택한 결정에 우리 부부는 다른 이유 없이 찬성을 했고, 아이는 자신의 행복을 채워갈 그 길로 나아갔다.


아이가 수술한 지 5년이 되기 전 아이에 대해 마음을 놓게 된 시간이 있다. 수술 후 만 3년이 지나던 시기로, 고3 여름쯤 아니었나 싶은데, 아래의 공모전에 응모를 하면서 '그래, 우리 아이는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할 만큼 의지를 갖고 있구나. 이제 안심이야.'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는 아이에 대해 큰 걱정은 내려놓았고, 지켜보는 마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3 입시준비하며 참가했던 게임회사 공모전_일러스트부문 불새상 수상

(한 게임회사에서 실시하는 불새문화제에서 공모전을 하는데 일러스트 부문에 출품을 했고, 아이는 불새상을 수상했다. 불새상> 금상> 은새상> 동상)


그리곤, 수술후 만 5년 되던해에 뇌검사를 하곤 혈관을 보여주시는데, 수술한 왼쪽의 혈관들이 오른쪽의 혈관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이 자라나 반짝거리며 환하게 빛이났다. 다행히 오른쪽 뇌혈관은 나쁘게 진행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함이 밀려왔는지 모른다. 이대로 산정특례도 끝이 나려나 기대를 했으나, 완치가 없는 병이라며 다시금 5년짜리 산정특례 대상자로 등록이 되었다.(산정특례제도:희귀질환자, 암, 중증난치질환자 등 확진받은 경우 의료비 본인부담률을 10%로 감면해주는 제도이다)




정리되어 가는 인간관계

나의 상황들은 주변의 인간관계를 정리하는데 한몫을 한 것 같다. 아픈 남편, 아픈 아이... 이런 상황들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절로 멀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친인척 안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회생활을 통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휴대폰이 말썽을 일으켜 바꾸게 되면서 불필요한(?) 관계의 사람들을 삭제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고민을 한 사람들도 없잖아 있었지만 안 봐도 그만인 사람들이 참 많더라는 것...


힘든 일을 겪으면 자연스럽게 주변 정리가 된다는 분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곁을 떠나거나 마음이 멀어진 그들에게 손을 내밀거나 어려움을 토로한다거나, 나의 힘든 상황을 들어달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처지가, 나의 상황이 싫어서 멀어졌든, 미안해서 멀어졌든 간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관계는 정리가 되어갔다. 처음엔 옹졸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겨난 날이 머지않아 다가왔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고 나의 힘겨움에 누군가의 힘겨움까지 짊어질 만큼의 여유가 생기지 않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가게 되었으니...)


남편이 투석하고 4년 차 되던 해.

큰 아이가 고1이었을 때, 등교를 시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처럼 하늘이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비슷한 빛의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교정을 걸었던 그 시절의 절친이라 여겼던 친구에게 정말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이 시간에 웬일이냐라고 물어왔고~ 처음 대답은 "하늘이 예뻐서"였다. 바쁜 시간일 텐데 하며 안부를 물어왔고. 비밀일 게 뭐 있나 친구인데 싶어 상황을 얘기했는데 친구로부터 돌아온 답변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난... 그저 하늘이 예뻐서 네가 떠올라 전화를 한 거야... 도와주지 않아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얘기하고 눈물이 나오려 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랬다.. 안 좋은 상황일 때 전화를 하면, 도움을 요청한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이런 거구나.

사람의 관계가 이런 거구나.

삶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나는 점점 그렇게 관계를 정리해 갔다.

그리고 조용히 지나는 시간으로 우리 가족에게만... 그리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내어주는 시간으로 그렇게 지나갔다.

나를 아는 이들에겐 무소식이 희소식인 것처럼 그렇게.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는 신호

내가 두통약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 3 때였다. 두통이 올 때면 지끈거리고 울렁거리며 빛과 소리에 민감해진다. 병원에 가면 편두통 또는 긴장성두통으로 말씀들을 해주셨고, 시중의 약이 잘 들으니 가방에 상비약으로 넣고 다녔다. 그러다 대학시절부터 결혼 전까지는 한참 두통이 뜸했고 결혼해서 남편이 아프고, 큰아이가 아프면서 대략 6년 정도 나도 다시 두통에 시달렸다. 의지만으로 찾아오는 두통까지 막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다 큰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고 슬슬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다시금 딱 그만큼...

불안정하지만 안정을 찾은 그 시기.

나도 2년 정도 두통약 먹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거의 안 먹기도 했던 것 같다...

작년. 2023년 2월까지~


무난하게 평온한 시간들은 흘러갔다.

남편은 남편대로 패턴에 맞춰진 삶으로 살아가고 있었고(그 사이 이식센터에서 두 차례 연락이 왔지만, 대기 순번 순서에서 밀리며 기회가 닿지 않아 기다림의 시간으로 잘 이어가고 있었다),

큰아이는 수술 후 5년을 경과하며 거의 일반인의 삶으로 잘 살아가고 있었다(물론, 1년에 한 번씩 여전히 뇌검사는 하고 있다)

나는 그사이 남편의 회사에 직원으로 탄력근무하며 일을 돕고, 그 외에는 가족들을 챙기는 주부로서의 삶으로 그렇게 살아갔다.


그 시간 안에 가족 모두 코로나는 걸렸었지만 잘 이겨냈고,

어린 자녀들은 잘잘한 감기 정도 걸렸다 낫기를 반복하며 건강에 있어서는 큰 문제없이 잘 지나갔다.

물론 학교생활도 자기들 자리에서 잘해주고 있었고.


여행이라는 글자는 더 이상 우리에겐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시 찾아왔다.

여행이라는 시간들이.

1박 2일간의 캠핑, 바다로 훌쩍 떠났다 오는 가벼운 여행들.

변해가는 자연을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들~

다시 찾게 된 이러한 시간들을 선물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아주 서서히 당연하게 여겨가기 시작했다.


폭풍전야라는 말.

조용함이 유지되는 그 평온함.

거기에 너무 취해서는 안되었다. 그 고요함 뒤엔 다른 이벤트가 어떻게든 또 찾아온다. 작던 크던 시련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대비할 수는 없지만, 언제든 시련이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그 상황이 닥쳤을 때 받아들이는 충격이 덜하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시험의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작년 3월 1일의 그날에...


이전 10화 아득한 어둠 속 그 안에서도 꽃은 피어난다-1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