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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각화 Apr 22. 2024

아득한 어둠 속 그 안에서도 꽃은 피어난다-12

너희들 앞에 늘 웃을 거야_엄만 괜찮아

왜 자꾸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힘겹다고 목내어 울지 않아 그러십니까.

아직도 여유가 있구나 더 아파보라고 시련을 얹어주시는 겁니까.

힘들어도 이겨내며 살아가는 저의 의지가 아직도 부족한 겁니까.

아이 넷.

아픈 남편.

아픈 큰아이.

이것만도 저는 힘에 겹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전생이 있었다면 제가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던 겁니까.

숨 쉬고 싶습니다.

웃고 싶습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아니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던 날. 나의 병명을 알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운전대를 잡고 시야가 흐려갓길에 차를 대곤 듣는 이 없어 서러움에 엉엉 소리 내어 울며 누굴 향한 원망인지 모를 온갖 말들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죄 없는 핸들을 내리치면서.


...............................


나의 절규가 통한 걸까.


나는 숨 쉬고 있고.

웃고 있고.

살아있다.

그것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2023년 3월 1일 수요일

공휴일이다.

그것도 화, 목, 토요일이 아닌, 남편 투석이 없는 공휴일.

이런 날은 가까운 근교로 먹거리를 챙겨 나가거나, 한두 시간 거리의 지역을 찜하곤 드라이브를 즐기며 콧바람을 쐬고 그 지역의 맛집에 가서 한 끼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것이 우리 가족의 이벤트였다.

일 년에 이런 날이 많을 것 같지만, 우리 가족의 특성상 이런 날을 찾기란 상당히 귀한 소중한 날이다.


그날은 한 시간 반거리의 남쪽 지역으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봄이 오고 있는 날이었고, 싱그러운 봄바람이 향긋하게 불던 날이었고 매화가 한창 피어 예쁜 날이었다.



"나왔는데, 자전거 탈까?" 하는 그의 제안에 아이들과 나는 모두 OK를 했다.

자전거를 빌리고, 천변도로를 지나 그 지역의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는 곳까지 이동을 했다. 대략 20여분 탔을까? 자전거를 파킹하고 이동하는데, 몸이 이상했다. 머리가 저리달까? 전기가 오는 느낌이랄까. 얼굴, 입 있는 데까지 저려 들어오는 느낌에 남편을 붙잡았는데, 손다리도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자기야, 나. 몸이 너무 이상해. 걷는 것이 너무 힘든데.. 이러다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지금 너무 이상해요. 머리도 아파오고 못 걷겠어. 추운 건가? 왜 이러지?"


그는 내 팔을 주무르고 얼굴을 만지더니 너무 차갑다고 했다. 맛집이고 뭐고 바로 옆 음식점으로 들어갔고, 다행인지 좌식 방이 있는 곳이라 들어가서 나를 눕혔다. 아이들은 내 팔다리를 주무르고, 그는 내게 지금 제일 힘든 게 뭐냐고 물어왔다.


"머리가 아파. 그리고 속도 안 좋고."


식당 아주머니들도 신경을 써주셨고, 가지고 다니시는 타이레놀이 있냐 없냐 서로들 찾으셨다. 그사이 남편은 약국을 다녀온다고 달려 나갔고, 큰 아이에게 엄마 정신 잃지 않게 하라고 당부를 했다ㅎ 반농담인 듯. 정신은 멀쩡했으니까.


따뜻한 방 안에서 아이들의 조물거리는 손길을 받다 보니, 조금씩 팔다리 저린 느낌은 사라졌다. 그때, 남편이 돌아왔다. 사온 두통약과 소화제를 바로 먹고 나니 아프던 머리가 멍해지며 통증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고,  좀 더 지나니 불편한 속도 편해지는 것 같았다.


한동안 두통에 시달리던 날들에서 벗어나, 상비약도 챙기지 않을 만큼 둔하게 살던 시기. 그만큼 마음이 평안했다는 얘기겠지만 가족들을 그렇게 놀라게 했다. 조금씩 몸이 풀리고 괜찮아져, 식당에 들어섰으니 한상차림을 주문하곤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연신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가족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곤 식당을 나섰다. 괜찮아졌다고 말은 해도, 얼굴색이 여전히 안 좋게 보였던지 남편은 아이들에게 오늘의 이벤트는 마치는 것으로 하자 얘길 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돌아와 쓰러져 자는데,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팔다리가 저릿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빠르게 응급실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시기라 그 또한 갱년기 증상 중에 하나로 받아들이고 이렇게 힘든 갱년기를 다들 겪고 넘어가시는구나 한탄을 했기에 그날의 내 몸의 신호를 특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했다.




건강검진

그렇게 이상한 몸의 신호를 느꼈던 날로부터 일주일정도 지날즈음, 건강검진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이유는 잠들고 두세 시간 지나면 머리가 너무 아파와 잠을 깨는 거다. 통증이 심해서 도저히 잘 수 없는.


고등학교 때 읽었던 스잔나라는 소설에서 뇌종양을 앓는 스잔나가 새벽마다 두통으로 잠에서 깨어나 힘들어했던 스토리가 떠올랐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역시나 새벽두통은 좋지 않은 증상이었다. 뇌압에 대한 부분도 나오고. 혼자 상상을 다하며 공포의 맛을 보곤 낮동안에는 별일 없이 멀쩡하였기에 아직까지 큰 병은 아닐 거란 생각으로 기본 건강검진에 40대 여성에게 추천하는 다섯 가지 정도 옵션을 넣어 검진을 했다.


결과는 불안정한 혈압, 경동맥에 죽종, 우상폐 결절, 갑상선 조직이 좋지 않음.


아주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불편했고, 당장 수술대에 올라야 할 만큼 심각한 병증이 나오진 않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몰랐던 내 몸속의 조직들을 알게 되면서 몸이 늙고 있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검진결과 경동맥 죽종이 있어 고지혈증약 처방을 받는 게 좋겠다 하셨고, 다만 새벽두통이 오는 것의 원인이 수는 없다고 하시며 신경과나 신경외과를 가보는 것을 권고하셨다. 개인병원이 아닌 종합병원급으로 가서 정밀하게 검사를 받아보라고.


대학병원 신경과 진료

집 인근 대학병원 신경과 외래. 초진으로 방문해서 30분 정도 상담을 했던 것 같다. 대학병원에서 그 정도의 시간을 상담하면 그다음 환자는 어떤 기분으로 기다릴지 모르는바 아니어서 문밖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동안 나타났던 이상했던 증상들에 대해 우선 뇌 MRI/MRA와 뇌혈류 초음파 오더가 내려졌다. 응급으로 당일 저녁에 바로 뇌검사는 했고, 뇌혈류 초음파는 다음날 아침에 검사 후 다시 외래가 잡혔다.


검사 후, 선생님을 뵙는데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첫 말씀을 떼시는데 이러했다.

"남편이 아프고, 딸은 모야모야로 수술을 하고. 애들은 넷이고. 이런 상황에서 병이 안 나면 이상한 거죠."

선생님의 말씀에 먹먹해져서 울컥했다. 그리곤 울먹이며 많이 안 좋은지 여쭤봤다. 내 표정이 상당히 심각했는지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시곤

"지금 정확히 말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다만 추가검사를 해야 해요. 2박 3일 ○○○님을 위해서 입원할 수 있겠어요?"

정확히 말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입원을 하라니. 말이 되는 말씀인지 싶었다.

대답 없이 확장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게 왜 입원이 필요한지 이유를 설명하셨다.

"환자분은 지금 우뇌, 중대뇌동맥이 MRA상으로 막혀있어요. 이러면 뇌로 혈액 공급이나 산소가 공급이 안 되겠죠? 보다 정밀한 검사가 필요해요. 저렇게 막혀있음에도 정상인처럼 살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거거든. 그리고 뇌혈류 초음파 검사상 혈류가 일반인보다 빨라요. 좌측은 2배, 우측은 3배. 이게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혈관에 협착이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거죠. 아무래도 뇌혈관이.. 우려가 됩니다."

명확히 답은 안 하셨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치만 내입으로 그걸 말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고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나에겐 나의 살점 같은 네 명의 아이가 있는걸. 아니어야만 해.'


나를 위한 2박 3일.

해야지.

입원.


평일 입원을 해야 한다는 말씀에 일주일 뒤로 입원 상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에게, 큰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상황을 전했다. 두 사람 모두 당황했지만 두 사람 모두 입 밖으로 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입원 날짜는 수요일로 잡게 되었다. 아직 어린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데, 그가 최대한 투석하지 않는 날로 선택하고 목요일이 큰아이가 공강이라 가능한 일정이 되었다.

 



입원 그리고 결과

둘째, 셋째, 넷째에게 엄마가 입원을 하니 아빠랑 큰언니 잘 따르고 있으라 당부를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린아이들이 왜 엄마가 입원을 하는지 물어오기에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다.

"엄마가 그동안 많이 피곤했거든. 선생님이 와서 좀 쉬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필요한 검사도 할 거 같아."


입원 첫날 기본검사와 뇌파검사. 채혈통을 열개나 채워갔다.


두 번째 날 뇌혈관조영술. 큰아이가 힘들다고 말했던 그 검사. 대퇴부를 절개하고 그대로 뇌까지 와이어를 올려 혈관촬영을 하는 정밀 검사. 검사하시는 의료진들은 일사불란하게 한 몸처럼 움직이셨고 검사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미리 안내되는 사항들에 조금 겁이 나긴 했지만. 오히려 검사보다는 병실로 돌아와 꼼짝 못 하게 4시간을 모래주머니로 묶어두는데 움직일 수 없으니 등이 아파서 힘들었다.


세 번째 날 핵의학과 SPECT 검사. 제일 힘들었던 검사다. 큰아이가 말했던 그 느낌을 내가 겪고서야 알았다. 구역질이 나고 검사하고 얼굴과 입, 혀까지 저렸다. 아침에 검사하고 그날 잠들 때까지도 그 느낌이 남아있었다. 약물 때문임을 알면서도 이러다 풍이 오는 거 아닌가 싶은 의심도 했다.


이렇게 검사들을 마치고 퇴원을 했고, 열흘 뒤 선생님을 외래에서 만났다.

선생님의 첫 말씀은 "괜찮아요?"였다.

짧은 대답을 했고.

전에 봤던 그 진지한 표정이 다시 선생님 얼굴에 스쳤다.

"모야모야입니다."


?

'그럴 리가요?

저는..

저는 그동안 아무 증상 없이 50이 다 되도록 잘 살았고, 딸아이처럼 쓰러진 적도 없고, 팔다리 힘 빠진 적도 없고, 무엇보다 그 힘겹다는 자연분만을 네 번이나 했음에도 문제없이 살았는걸요? 그리고 절대 저는 아프면 안 돼요. 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은요...'

마음속에서 랩을 하듯이 마구잡이로 말이 올라왔지만 한마디도 뱉지 못했다.


그냥 눈앞이 흐려졌고, 한참을 흐느꼈다.

건네주시는 화장지와 툭, 툭,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는 의사 선생님의 힘이 들어간 손의 느낌만 잠시 오갔다.(살면서 의료진으로부터 받은 두 번의 인간다운 토닥임. 이것이 두 번째의 토닥임이다.)

얼마간 시간을 주시곤 힘 있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님. 괜찮을 겁니다. 괜찮아요. 지금 상태는 초기이며 ○○○님은 어른이라 잘만 관리하면 다른 일 없이 지금처럼 살 겁니다. 잘 관리하는 방법은 평상시보다 조금 느리게 생활을 하는 거예요.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뛰지 말고 걷고, 산보다는 바닷가를 걷고, 주말에 4시간씩 타던 자전거 평지로만 한 시간 정도 타고, 땀 흘릴 만큼의 운동은 하지 않도록 지내는 겁니다. 처방해 주는 약들 잘 먹고. 1년에 한 번씩 뇌검사하고. 그럴 리 없어야겠지만 깨지는 두통이 오거나 말이 어눌해지거나 팔다리에 힘이 빠지면 바로 응급실로 오는 거예요. 아시겠죠?" 전에, 남편이 응급으로 혈액투석을 했을 때 담당의를 만나 남편 앓고 있는 유전질환의 실체를 들었을 때 작동되던 녹음기가 다시 작동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진정을 하고 고개를 들으니, 화면에 뇌사진을 띄워놓고 계셨다. 사진 속 점들을 보여주시면서 잠시 뇌졸중이 왔다가 간 것 같다고 하셨다. 아마도 3월 1일 그날의 증상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된다는 말씀과 함께. 위험천만이었던 몸의 신호를 나는 두통약과 소화제로 다 나았다고 여겼고, 그런 증상들을 갱년기 증상 요란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한순간 알게 되었다.


우뇌는 굵은 혈관이 거의 막힌 수준이라 작은 혈관들이 혈액과 산소공급을 하고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고 그러다 보니 쉽게 뇌출혈이 올 수 있어 그것을 막는 약을 처방해 준다고 하셨다. 모야모야 자체는 약이 없고 안 좋은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혈압약, 아스피린, 고지혈증 약 이렇게 먹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모야모야병 환자가 되었고, 그날 바로 산정특례대상자가 되었다.

(모야모야병은 유전이라기보다는 가족력이라고 한다. 한 집안에 여러 모야모야병 환자들이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것이 모두 유전이라고 볼 수는 없단다. 나의 경우는 유전자 검사 결과 모야모야병 유전자를 양성으로 보유하고 있는 경우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형제나 직계를 다 검사하여 볼 필요는 없으며 나오는 증상에 따라 대처하는 것이 맞다고 설명해 주셨다. 즉, 유전자가 있어도 발현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난해한 답변이다. 그의 권유로 큰아이가 수술했던 삼성서울병원 신경외과 외래를 다녀왔으나, 현재 수술을 고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셨다. 약한 혈관이 많은 경우 혈류를 늘리기 위해 수술을 하면 혈류량이 늘면서 오히려 뇌출혈 발생 가능성을 높여 위험을 감수할 만큼 수술로 이득의 확률이 크지 않다는 것.  지금은 처음 진단한 병원에서 해주신 대로 관리하고 약을 먹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하셨다. 나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명의를 지방 대학병원에서 만난 셈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너희들 앞에 늘 웃을 거야_엄만 괜찮아

외래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혼자 실컷 울고 어이없어 실컷 웃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리고 너무 미안했다. 큰 아이에게. 선생님은 그렇게 연결 짓지 말라고하셨지만, 나의 유전자로 인해 큰아이가 그런 아픔과 시련을 받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넷째가 하교를 했다. 넷째가 좋아하는 크로플을 굽고 우유와 함께 간식으로 챙겨줬다. 아주 맛있게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이 천사처럼 예뻤다.


셋째가 하교를 했다. 셋째가 좋아하는 라면을 끓여 간식으로 챙겨줬다. 후루룩~ 시원하다며 밥도 조금 먹어도 되냐는 아들에게 "그럼~" 반공기 냉큼 떠줬다. 언제 저렇게 컸나 든든하기만 했다.


둘째가 하교를 했다. 저녁 메뉴가 뭐냐고 묻는 아이에게 "마라탕 사줄까?" 물었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당시 둘째가 그 맛에 매료되어 일주일에 한두 번은 먹어야 한다고 얘길 했던 음식. 못 먹게 하더니 웬일로 먼저 사준다고 하는 엄마가 이상했던지 눈이 휘둥글한다. 그 모습도 예쁘다.


자취하는 큰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는지. 1차 졸업작품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몸 챙겨가며 슬슬 준비하라고 얘기하고 끊었다. 아픔을 받아들이고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는 큰아이가 그저 대견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엄만 괜찮아.

너희들 앞에 엄마는 늘 웃을 거야.'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만의 감정쓰레기통온갖 감정과 함께 비밀스레 적혀 있는 당시의 메모.

그에게 남긴 메모가 없는 걸 보면 그에게는. 그의 앞에서는 그저 위로받는 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그날도 가정의 날이 되었다.

남편과 둘이서 외식을 했고, 케이크 하나 사들고 6개를 챙겨 와 촛불을 켰던 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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