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포석을 두는 추상화
앞선 글에서 기획자가 세상의 빈틈을 채우는 방법을 찾은 이후, 찾아낸 방법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좋은 방법을 찾았으면 바로 실행하면 되는 것인데,
왜 구태어 이름을 붙이는데 시간을 보내야 할까요?
초기 기획 아이디어는 빈틈을 메꾸는데 필요한 몇 개의 점과 선의 형태입니다. 그 점과 선도 선명한 검은색이 아니라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보일 듯 말듯한 회색입니다. 따라서 이름을 지으며 몇 개의 회색 점과 선을 가지고 빈틈을 채우는 나름의 그림과 구조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상화를 그려내 보는 것입니다. 그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내가 그리는 그림은 이거야!'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추상화를 그리는 힘이 왜 기획자에게 중요할까요?
기획자가 만나는 빈틈은 대부분 채우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당연히 상식적으로 채워져 있어야 될 것 같은 빈틈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채우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시도했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 이니까요. 이경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앞서 시도한 이들이 썼다가 지운 자국과 흔적입니다. 그러나 그 흔적을 따라 그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되면 좋겠다.' '이런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감각을 가지고 나만의 구조와 구상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추상화를 그리는 것은 전체를 보는 연습이자 맥락을 보는 연습입니다. 다른 시각에서는 덜어내는 연습이자 핵심을 남기는 연습입니다. 바둑에서 전체 경기를 상상하며 초반에 포석을 두는 행위와 같습니다. 몇 개의 돌을 가지고 전체의 형국을 그리며 중후반부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듯, 추상화는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또한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어야 그것을 바탕으로 각 부분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습니다.
기획자는 R&R이라는 구체화에 갇혀선 안됩니다.
회사에서 우리의 업무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능으로 정의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능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로써 일을 합니다. 회사에서 구체화는 스스로 연습하지 않아도 주어집니다. 회사가 주는 추상화를 구체적으로 따라 그리며 구체화를 반복적으로 연습합니다. 나의 역할과 소임을 충실히 충분히 해냅니다.
문제는 우리는 회사와 인생에서 추상화를 스스로 그려야 하는 기획의 순간을 누구나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통상 회사에서는 연차가 진행되며 그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또 다른 문제는 기획은 구체화의 세상이 아닌 구체화와 추상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진자운동의 세상이라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사실을 모으고, 몇 개의 흔적/사실/힌트를 가지고 추상화를 그리고, 추상화의 각 부분을 구체화하고, 다시 전체를 조망하는 것의 반복입니다.
진자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R&R을 넘어 추상화를 그리는 연습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한 단어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덜어내야 합니다. 제약 없는 나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상상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도 몇 개의 점으로 여러 추상화를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