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 의미가 있고 전체도 의미가 있는 구조
인생의 가장 젊은 시절을 바친 기획 결과물은 잘 휘발됩니다. 일단 기획의 결과물이 보고가 되더라도 실행으로 옮겨지기 쉽지 않습니다. 보고는 나의 몫이지만 실행은 많은 이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한번 실행에 옮겼더라도 그것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고백하자면 지난 10년간 기획한 것 중에 지금도 회사의 경영체계에서 살아 숨 쉬며 제 역할을 하는 것은 손에 꼽습니다. 특히 경영층 지시사항이나 수명사항이라는 이름으로 단발성으로 하는 업무도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기획자로 일하며 가장 큰 불안감을 준 것이 이 지점이었습니다. 매번 최선을 다했지만 그 결과가 축적되지 않고 그때의 죄선으로만 역할을 하고 휘발되는 느낌. 매번 새로운 땅을 열심히 삽질해서 파기만 하고 그 위에 건물은 못 올리는 느낌. 무엇보다도 경력이 쌓일 수로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퇴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 불안감을 이기고자 하나하나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1년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의미와 이름을 짓는 노력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습니다.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업무 성과의 측면에서도 소정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해 한 해는 좋았지만 전체 커리어 측면에서는 여전히 단절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부분 최적화(local optimization)는 하였지만 전체 최적화(global optimization)는 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계속되었습니다.
기획의 결과가 켜켜이 쌓이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쌓이는 감각은 하나하나의 일이 그 자체로도 의미와 각자의 이름 가지면서도, 그 일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는 느낌입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하나하나와 전체가 각자 강렬한 색을 내며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의미만을 강조하면 하나하나의 일이 의미를 잃습니다. 전체를 위한 과정으로 치부될 뿐입니다. 그리고 전체가 흔들리는 경우 각 과정은 급격하게 의미를 잃습니다. 또한 전체를 하나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면 과도하게 일의 덩어리가 커지고 기간이 오래 소요됩니다. 일이 리듬감과 약간의 긴박감을 가지고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늘어집니다. 결과물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나하나의 일만 강조하면 앞서 말했듯이 휘발되고 쌓이지 못합니다.
전체의 맥락과 하나하나의 일을 모두 잡는 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시도할 수 있습니다. 개별 프로젝트 관점에서는 일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제안할 수 있습니다. 핵심적인 의미는 개별 프로젝트 자체에 집중하되, 전체 맥락에서의 의미를 부수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000의 목적으로 추진합니다. 큰 맥락에서는 000의 의미를 갖으며 다른 프로젝트와는 000의 관점에서 연계됩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 할 점은 핵심적인 의미는 반드시 개별 프로젝트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의 영역/목표/의미가 선명해집니다.
전체 맥락의 관점에서는 먼저 나의 기획을 쌓아갈 테마를 설정해야 합니다. 하나하나의 기획의 결과가 담길 바구니를 만드는 것입니다. 브런치북이나 매거진을 통해 글이 담길 바구니를 만드는 것과 동일합니다. 다음으로는 테마의 시계열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축을 부여하기 전의 테마는 단순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개념을 부여하면 순서가 생기고 순서는 테마에 스토리를 부여합니다. 일종의 순서를 갖는 글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스토리를 부여하면 맥락이 생기고 연결됩니다. 그 맥락에서 개별 프로젝트가 위치하는 형국입니다. 프로젝트의 가치는 포지셔닝이 결정합니다. 중요한 맥락을 다루는 프로젝트가 가치를 갖습니다.
이렇듯 켜켜이 쌓이는 기획은 결국 설계이고 또 다른 기획입니다.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으면서 전체도 의미가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