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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Feb 15. 2022

마음의 감염

  어제 S는 15년 전쯤에 같은 학원에서 일했던 R을 만났다. 함께 지낸 기간은 1년 정도였다. 친하지도 그렇다고 척질 일도 없었던, 그저 같은 공간에서 인사를 주고받고 가끔 시시한 얘기 몇 마디씩 나누는 사이였다. 오랜만에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었고, 술을 마시게 되었다.


  R의 상황은 몹시 좋지 않았다. 학원을 옮겨 다니다가 그만두고 사업을 벌였는데 잘 되지 않아 빚만 늘었고, 아내와는 별거 상태였다. 지금은 막노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말을 하는 R에게서 막막함의 기운, 절망에 절어 있다는 느낌이 훅 끼쳐왔다.


  상황이 좋지 않은 건 S도 마찬가지다. S도 학원을 옮겨 다니다가 교습소를 시작했는데, 근근이 생활비를 버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3년 전에 사귀던 여자와 헤어지고, 그 이후론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외롭고 우울하게 살아가고 있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니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니 하는 얘기들이 회자되지만, S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주변을 보면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한 명의 연봉이 1억 원이고 세 명의 연봉이 1000만 원씩이면, 네 명의 평균 연봉이 3000만 원이 넘게 되는 이치이리라,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라는 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면 무엇 하랴. OECD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인 나라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R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S는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살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자살 생각이 들 때가 있었지만, 그저 잠시 스쳐지나가는 미풍과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폭풍처럼 강렬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처럼 절망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아무 희망이 없다, 더 살아서 무엇 하나…….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무엇에 사정없이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무겁다. 머리도 지끈거린다. 이렇듯 심하게 요동치는 ‘마음의 감염’은 처음이었다. 독감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꼼짝없이 독감에 걸려 고생해야 하듯, 절망 바이러스의 위력 또한 대단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R이 지닌 절망 바이러스보다 S가 지닌 희망 바이러스나 행복 바이러스가 더 강력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S의 영향으로 R의 마음이 조금은 밝아졌으리라. 그러나 외로움과 우울감이 출렁이는 S의 마음에 절망감이라는 R의 강풍이 불어와 합류하게 되자 자살 충동이라는 태풍이 몰아친 것이리라. 


  책장의 책들을 죽 훑어보다가 S는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펼쳐들었다.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임을 저자는 우화 형식을 통해 말하고 있다. 나쁜 영향을 주고받으면 안 좋은 세상이 되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면 좋은 세상이 된다. 자신만의 성공을 위해 남을 짓밟고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서로가 적이 되어 시기하고 증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을 기울이는 세상이 되면 모두의 삶이 향기롭게 변한다. 그 출발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애벌레마다 내부에 나비가 한 마리씩 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더 큰 ‘나’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작은 ‘나’에 안주하고 변화하고자 하지 않으면 더 큰 ‘나’를 만날 수 없다. 더 큰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작은 ‘나’를 꽁꽁 동여매고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음에 R을, 아니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행복 바이러스나 희망 바이러스를 감염시켜야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변화를 추구해야겠다고 S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가슴에 머금고 있자니 마음에서 조금씩 먹구름이 걷혀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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