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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11화 (2)죽은 그를 찾아온 건 냄새를 맡은 들개였다

붉어지는 사수의 코끝이 심상치 않았다. 유족 측과 조문객 측이 한 상에 둘러앉은 틈에서 사수가 베일 끝에 눈물을 찍어냈다. 눈곱인 척 속일 수 없는 양이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던 그때 스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마 그때가…… 그러니까……  나무아미…… 나무…… 으흐흐흑……"


먼저 목놓아 울음을 터뜨린 이는 스님이었다. 스님에게 어리둥절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곧 뿔뿔이 흩어졌다. 똘라는 휴지를 끊어 스님 손에 쥐여주었고, 사수는 대롱거리는 눈물방울을 대충 마무리하곤 물을 한 컵 따라 스님 앞에 내밀었다. 아까부터 낯선 냄새가 나더라니. 대장 조리사는 죽은 고기가 넘쳐나는 육개장 대신 사발에 뿌리를 내릴 듯 모든 재료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채소탕'이라는 신메뉴를 내왔다.


스치듯 안녕이라던가. 스님과 나는 그런 사이였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나긴 했지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헤어질 때면 스님은 꼭 민머리를 한 번 쓸어내린 뒤 '길 조심하시게' 하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스님과 작별하는 그곳엔 언제나 빛이 있었다. 대낮에도 한밤중에도 반지르르한 정수리를 빛내며 내게 합장해 오는 스님은, 아래를 구부정하게 아울러 보는 가로등 같았다. 어느 날부턴가 도다리의 입버릇이 되어버린  '이상 무'. 그 '이상 무'의 기원이 스님이 강조하던 '길 조심'은 아니었을까, 나는 새삼 되짚어보았다.


똘라와 마찬가지로 구 캄보디아인인 스님은 대한민국에 있는 '캄보디아 불교센터'의 수장이다. 한국인이 된 지 어언 40년, 종교인의 역할은 물론 한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장례를 주관하고, 유골 송환을 비롯한 죽음 뒤의 일까지 맡고 있다.


불교국가인 캄보디아에서 스님은 가로수만큼이나 흔하다. 그만큼 일상, 삶 그 자체와 같은 인물로 추앙받는다. 안 끼는 데가 없으므로 장례식에도 빠질 수 없다. 그들은 장례 기간 내내 염불을 외며 망자의 혼을 달래고 극락에 가시라, 기원한다. 유족은 이를 통해 슬픔이 희석될 만큼 큰 위안을 얻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망자가 생전에 지은 죄를 씻고 실제로 극락에 갔다고 믿는다.


이러한 그들의 문화 탓일까. 한국에서 일하는 캄보디아인 노동자들은 다치거나 아프면 병원에 가는 대신 '캄보디아 불교센터'의 스님을 먼저 찾았다. 바로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예약한 방문 날짜를 미루고 미루다 병이 깊어져 죽기 직전에 찾아오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외국인 노동자 센터장이자 스님의 협력자이며 한때 크리스천이었던 도다리는 이젠 몸이 기억할 뿐인 성호를 여러 번 긋곤 했다. 습관이 무섭다고. 이건 저절로 나오는 안도의 몸짓이라고. 이 경우 치료를 시도할 수 있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죽어서 찾아오는 이들도 허다하다고. 한 줌 재가 되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 센터장이었던 도다리는 스님을 존경한다면서도, 업무상의 일로 스님과 통화라도 할 때면 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저리를 다. 스님과 직접 대면했을 땐 가로젓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어지간히도 일하기 싫은가 보다…… 하고 얼렁뚱땅 넘겨도다리의 도리질. 이제 보니, 도다리의 도리질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매번 정도에서 그친 게 다행이었다. 나는 되새겨보았다. 그들에게 업무란, 삶 혹은 죽음에 등급을 매기는 일이었음을.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 혹은 죽음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리하는  일. 불쑥 마스크 안으로 뜨거운 기운이 치밀었. 법의 테두리로만 증명되어 온 나는 안다. 법의 그 허망함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도다리. 도다리를 아는 그만큼, 나는 도다리를 모르고 있었다. 법의 허망함을 알면서, 큰마음먹고 법전을 펼친 순간 그대로 잠들어버렸던 것처럼.



*



대장 조리사를 향해 공손히 합장한 스님이 짙푸른 채소탕 국물을 반 숟갈 뜨곤 수저를 내려놓았다. 한동안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국물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꿀떡 넘긴 스님. 커다란 주먹이 목에 걸린 듯 스님의 울대뼈가 꿀렁꿀렁했다. 그렇게 창밖을 응시하며, 자신을 추스른 스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마 그때가…… 그러니까……"


그렇게,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아니, 나만 모르는 이야기가.


평균 연령 70세를 상회하는 빈소 식구들의 기억력과 감정선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스님의 시작과 동시에 그들은 마치 돌림노래하듯 서로의 기억을 주고받으며 나만 모르는 도다리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똘라 역시 나보다도 매끄러운 한국어 실력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조금은 위태로웠던 서로의 분절에서도 그들은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치거나,  맞아…… 맞아…… 하며 고개를 떨구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맞아? 맞아? 이러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점점 쭈그러들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 속 도다리는, 내가 몰랐던 도다리임과 동시에 그동안 내가 딱히 몰라도 되었던 도다리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건, 내가 먹고 자고 싸기만 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니까. 가장 작았던 그때.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는 직장, 안전한 직장을 찾아 헤매는 게 욕심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자람 보육원에서 퇴소한 도다리는 바로 취업을 시도했다. 면접만 70번. 도다리의 열정을 알아보는 기업은 없었다. 도다리는 거금을 들여 장만한 면접용 정장을 고이 접어 찬장 겸 옷장인 찬장 귀퉁이에 넣었다. 이렇다 할 배경과 스펙과 재능이 없는, 대학이라는 궤도를 벗어난 비주류가 사회에서 시도할 수 있는 일은 최저 시급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그곳은 면접용 정장이 필요 없는 세계였다. 면접 자체가 필요 없기도 했다. 수상 경력이라곤 개근상이 전부인 최종 학력 고졸의 사회 초년생은 최저 시급의 세계에서도 위험하고 불안정한 가장자리로 내몰렸다. 퇴소할 때 주어진 자립급 500만 원은 좁은 월세방 보증금을 내고 살림살이를 몇 개 사고 나니 흔적도 없었다. 최저 시급을 모아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나면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하기에도 빠듯했다. 도다리와 같은 스펙의 고대로는 몇몇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일단 국방의 의무라도 다하고 오겠다며, 사수에게 도다리를 거듭 당부한 뒤 자원 입대한 참이었다. 벌써 철없는 남편이라도 되는 양 구는 고대로를 보며 도다리는 천불이 났다. 자립한 지 일 년여 남짓. 이젠 사수라는 그늘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천불이 난 속을 털어놓을 사람은 암만 봐도 사수밖에 없었다. 고대로랑 그만 갈라서야겠네, 알바고 뭐고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시도 때도 없이 사수에게 전화를 걸어 죄 없는 사람을 들들 볶았다. 언제까지 보육원에서 보내오는 쌀과 살림살이로 연명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도다리는 잘 알았다. 하지만 날마다 맨밥에 김치만 먹다간 연명보단 단명을 걱정하다 죽지 싶었다. 다달이 따박따박 날짜 맞춰 보육원을 찾아가 필요한 것만 쏙쏙 골라 챙겼다. 그래도, 도다리는 양심은 있었다. 따박따박 챙겨갈 때마다 따박따박 사수에게 편지도 썼으니까. 성공하면 이자 쳐서 갚겠다고. 그럼 이만 줄인다고. PS: 다음 달에 또 뵙자고.


자립방에서 하라는 건 안 하고 연애만 한 게 후회되었다. 보육원 담장 너머의 세계는 가도 가도 가시밭길이었다. 정규직의 세계에는 발도 들일 수도 없었다. 면접관에게 무엇이든 배울 준비가 되었다고 했더니, 그걸 배우기 위해 뭐라도 배워 오라는 세계가 그 세계였다. 스님을 처음 만나던 날도 도다리는 정규직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고깃집 주방에 쪼그려 앉아 얼마 전에 시작한 불판 닦기 아르바이트를 막 끝낸 참이었다. 오늘따라 눌어붙은 불판이 많아 할당량 50개를 채우는 데 평소보다 한 시간을 더 썼다. 무기력하게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도롯가에서 웅성웅성하는 한 무더기 인파가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플래시 불빛을 번쩍번쩍 정수리로 반사하며 이국의 스님이 인터뷰 중이었다.


"살아서 나를 찾는다면 좋겠지만…… 드물지요……"


도다리는 얼떨떨했다. 단순한 종교 행사쯤으로 짐작했던 건, 외국인 노동자의 추모식이었다. 단출한 제단에 놓인 그의 가족사진에 눈길이 갔다. 그는 한 아이의 아빠였다. 젊다기보단 아직 어려 보이는 그는 타국의 컨테이너 숙소에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발견되었다. 죽은 그를 찾아온 건 냄새를 맡은 들개였다. 깊은 밤 시끄럽게 짖어대는 들개 무리. 염색의 흔적이 뚜렷한, 얼마 전까지도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반려견으로 불렸을 개새끼들…… 개새끼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다고, 주민들의 신고 전화가 빗발쳤다. 119 구조대가 출동하고, 형형색색의 들개 무리가 집요하게 긁어대는 뜨거운 여름날의 컨테이너 안에서 그는 녹은 채 구조되었다.


인터뷰의 막바지. 이국의 스님은 특히 형형색색과 개새끼 부분에 힘을 주며 그의 사연을 쏟아냈다. 도다리의 눈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멍하니 걷다 푹 꺼진 땅에 발을 디뎠을 때, 자신의 안쪽에서 일어나는 그 아득한 무너짐처럼. 가족사진 속 그들이 유리알에 갇힌 듯 부옇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다리는 열 살 때 자신을 자람 보육원에 맡긴 아빠를 떠올리곤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도리질을, 도다리는 오래도록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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