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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10화 (3)거짓이 꼭 거짓인 건 아니란다

고대로의 반향 이후, 사수는 자람 보육원의 자식들에게 성경은 물론 미사도 강요하지 않았다. 전도를 등한시하는 게 죽은 뒤 지옥 불에 떨어질 중죄라 해도 두 번 다신 타인의 종교 선택권을 박탈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이제 아이들은 당연히 성당에 가야만 했던 주말에도 자유롭게 미사를 참례하거나 개인 시간을 갖게 되었다. 때문에 훈풍 수녀회가 배출한 자발적 크리스천은 일 년에 한 명이나 될까 말까. 따뜻한 봄바람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퍼뜨리겠다는 포부와는 거리가 먼 실적이었지만 수녀회의 수장인 사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아. 그저 바라볼 뿐이지."


알고 보니, 사수는 내가 생모의 존재를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자라길 기다려온 것뿐이었고 어디에도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진작에 사수가 내 엄마, 나를 배 속으로 낳은 엄마라고 믿어버린 나는 사수에게 생모의 편지를 건네받기도 전, 골목에 옆 동네 아이들까지 끌어모았다. 그러곤 사수가 나를 배 아파 낳은 게 틀림없다고, 태어나던 순간이 똑똑히 기억난다고, 아빠 얼굴을 실제로 본 적도 있다고 떠들었다. 작은 시골 마을엔 능구렁이 같은 수녀가 몇 해 전에 배 아파 아기를 낳았다더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나는 생모의 편지를 교제 삼아 한글 공부에 매진하던 어느 날 사수에게 처음 회초리를 맞았다. 그래도 죽으라고 때리진 않아서, 딱 죽지 않을 그만큼 아팠다.


부어오른 종아리를 문지르며 다짐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을 저지르기 전이든 저지른 후든 뭔가 께름칙-하면 일단 성당으로 도망간 다음 예수님께 먼저 빌어봐야지. 사수는 내게 성경도 예수님도 강요한 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회초리를 맞는 내내 예수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부활절 달걀 등, 뭔가를 얻기 위해 어쩌다 성당 문을 열 때면 저 앞에 보이던 거대한 벽화. 몇 번 힐끔거린 게 전부인 그 속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자기보다 더 큰 십자가를 등에 진 예수님은 한눈에도 지쳐 보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어서 누굴 때리진 못할 듯했다. 오히려 벌써 누구한테 맞았는지 수두룩한 사람들 틈에서 예수님만 피투성이였다. 나는 가시가 잔뜩 돋친 예수님의 수상한 왕관에 주목했다. 내 아빠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만약 내가 부어오른 종아리를 문지르며 사수가 나를 이렇게 때렸다고 이른다면, 어쩐지 그는 가시 왕관을 멀리 벗어던지고 나를 번쩍 들어 안아줄 것 같았다. 꽉 안고 한참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내게 부드럽게 이마를 맞대며 이렇게 말해줄 것 같았다. 거짓이 꼭 거짓인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뒤로도 자주 께름칙했다. 그때마다 사수의 눈을 피해  성당으로 달렸다. 예수님한테 먼저 빌 거라는 그 다짐은 한 번도 지켜지지 못했지만. 나는 벽화 속 예수님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예 성당 문 자체를 열지 않았다. 성당 입구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커다란 성모 마리아 님한테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성모 마리아 님은 인상이 참 좋았다. 미소가 넉넉한 게 성모 마리아 님 역시 누굴 때릴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또한 성모 마리아 님은 예수님의 엄마, 그의 가족이었다. 예수님한테 비나 예수님 엄마한테 비나 그게 그거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빈다면 엄마 쪽에 비는 게 나을 듯했다. 뭘 끝까지 빌어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성모 마리아 님한테도 대충 인사만 하고 돌아서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빌려고만 하면 발꿈치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성당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모르는 얼굴과 아는 얼굴이 같은 얼굴로 뛰놀았다. 언제 왔는지, 저쪽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수는 마치 소문을 잊은 듯 천국에 있는 표정이었다. 빌어도 안 빌어도 일상은 평화로워졌고, 뛰어노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나는 피투성이 예수님을 잊어갔다. 인상 좋은 성모 마리아 님은 그보다 먼저 잊어버렸다. 마침내는 께름칙한 게 있든 없든 애들하고 놀려고 성당을 찾았다. 그리하여, 나는 영정 사진 속 그들처럼 무교다.


"자비, 함께할래?"


자리에서 일어난 신부님이 검버섯 핀 손으로 성경책을 흔들며 물었다. 늙은 수녀님들이 비슷한 소리를 내며 뒤이어 일어났다. 제단 앞에 일렬횡대로 서서 서로의 간격을 조율하는 게, 그들은 추모 미사를 준비하는 듯했다. 장례 방식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절차였다.


"저는 여기서 함께할게요."


나는 상주 자리에서 그들의 추모 미사를 지켜보며 나만의 마음속 추모사를 읊기로 했다. 정리가 되지 않아 그렇지, 그들에게 전하지 못한 말은 사흘 밤을 새워도 모자랄 거였다.


추모 미사는 예상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게 진행되었다. 슬픔이라곤 한 방울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을 참느라 나는 혼깨나 났다. 가만있어도 박장대소하는 듯한 주관자의 인상 영향이 컸다. 신부님의 입꼬리는 하늘에 사는 누군가가 양쪽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원체 치켜 올라가 있었다. 때문에 신부님은 기뻐도 웃고 슬퍼도 웃고 그냥 노상 웃는, 어디 하나가 풀린 사람이라는 서글픈 누명을 쓰곤 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수난을 기린다는 부활절에도 신부님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내 가만히 지켜보았는데 분명히 웃는 거라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비웃는 저놈은 사이비가 분명하다고, 어떤 신자는 신부님을 겨냥해 성체와 성혈과 삶은 달걀을 던져버리기도 했다. 끝으로 성경책이 날아들었지만, 그때도 원체 올라간 신부님의 입꼬리는 더욱 끌어올려질 뿐이었다. 부활절마다 성당과 교회를 돌며 달걀이 반숙이라는 등의 이유로 성경책을 던져온 그 신자는 결국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수갑을 찼다. 하지만 내 눈에는 묻지마 테러를 당하는 순간에도 위로만 솟구치는 입꼬리를 갖고 태어난 신부님이 죄인 같았다.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나는 부활절 달걀을 받기 위해 성당에 가지 않았다. 달걀은 어차피 사수가 챙겨 왔다.


"뜨거운 성가였습니다!"


뭘 강요하지 않는 그들다운 선곡이었다. 성가는 총 세 곡이었는데 무반주였음에도 세 곡 다 완성도가 높았다. 발끝을 들썩이게 되는 가장 신명 나는 성가를 끝으로 추모 미사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늙은 형제자매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각자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두 볼에 홍조를 띤 신부님이 미사의 마지막을 알렸다. 화성을 쌓고 싶은 걸, 일부러 영정 사진을 빤히 쳐다보며 나는 겨우 참았다. 왕년 성가대 실력에 심취한 사수의 화성이 어긋날 때마다 얼마나 목젖이 간질거리던지…… 그러고 보니 노래한 지가 언제야…… 술렁이는 본능을 억누르며, 개인 기도에 들어간다는 그들의 식순에 따라 나는 눈을 감았다. 성가에 취해 고인들에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다 끝나가는 마당에 마음속 추모사를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


자고로 추모사란 어떤 템포로 시작해야 하는 걸까. 굳게 닫힌 마음속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비야, 눈 떠. 신부님 가셨어. 가서 애들 챙겨야 한다고."


약간 쉰 듯한 사수의 목소리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방금 눈 감은 것 같은데 그들의 기도는 벌써 끝이 난 모양이었다. 어서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데, 마음속 내 입술은 마스크가 겹겹이 씌워진 듯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였다. 아다지오에서 시작해 포르테에서 끝을 맺은 성가의 뜨거운 열기만이 내 발끝을 들었다 놨다 다. 나는 세차게 고개 저으며, 움찔대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이거? 저거? 그거? 아 쫌! 어떤 거! 면도날을 쥔 순간 알아서 풀가동되던 방향 감각을 되새기며 다시 한번 멘트를 골라보던 그때였다.


"나무아미타불."


예상 답안엔 없는, 예상치 못한 한마디였다. 나는 눈을 떴다. 늙은 수녀님들이 느릿느릿 뒤를 돌아보았다. 조는 건지, 흥겨운 성가 소리에도 주방에서 연신 고개를 주억이던 모태 불자 대장 조리사가 반색을 하며 합장했다.


낡은 주황빛 승복이 정갈했다. 마치 노년의 간디와 같은 모습으로 빈소에 들어선 스님이 한쪽에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스님의 구릿빛 손등에 돋은 쭈글쭈글한 혈관이 멀리서도 또렷했다. 뒤이어 경찰복을 입은 똘라가 합장하며 빈소로 들어섰다. 흘러내릴 듯한 눈가와 무겁게 들어 올린 입꼬리. 그들의 똑같은 표정이 그들의 복잡한 심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제단 앞에 섰다. 똘라가 사뿐 그 뒤를 따랐다. 오밤중 11시. 이역만리에서 떠나온 그들은 내가 상주로서 맞는 첫 조문객이었다. 긴장된 몸짓으로 마스크를 정제하며, 이 순간 상주는 까닭 모를 확신에 휩싸였다. 굳게 닫힌 마음속 입술 사이로 언젠가는, 반드시, 노래가 흘러나올 것이라고. 죽고만 싶어 다리 위에 선  내 안으로 내 안으로 날아 앉던 노래가. 그곳에, 용케도 뿌리를 내린 이 노래가. 위 아 더 월드♪ 으흐흠으흠……


마음속 추모사는 행방이 묘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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