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그건 믿음이 필요 없는 연결이니까
자아의 적응력은 놀라웠다. 한 시간은 기본으로 우는 아기를 안고 고군분투했던 어제가 벌써 그 옛날 추억 같았다. 적응한다는 것과 무뎌진다는 것은 같은 의미 아닐까. 저 알아서 잠에 뚝 떨어진 효자 고자아의 볼을 나는 가만가만 쓸어내려 보았다.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그전에 문을 등지고 육개장 국물이 말라붙은 마스크를 교체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다. 영정 사진 앞에 예수님의 자녀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상주 자리에 앉아 있던 사수가 내 기척을 느꼈는지 끙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 형제자매 곁으로 옮겨 앉았다. 나는 상주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그나저나 사라, 천주교 장이 아니네요?"
신부님이 사수에게 물었다. 뭘 좀 드셨는지, 신부님 배 속에서 특별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장례식도 아니고…… 무교니까요. 둘 다."
끄덕끄덕…… 과연 사수다운 조처라는 듯 식구들이 고개를 주억였다.
자칫 이건 방임이 아니냐며 비수를 꽂는 주위 시선에도 사수는 꿋꿋했다. 보육원 아이들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사수는 뭘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사수 역시 그럴 만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다만 오래되었다.
"예수님은 지긋지긋합니다! 축구하고 싶다고요!"
얌전하게 성경을 읽어오던 열 살 고대로가 어느 날 그렁한 눈으로 성경책을 덮으며 대들었을 때, 지금껏 한 줄이라도 더 읽히려고 잔머리를 굴려온 사수는 문득 등골이 서늘했다. 예수님은 이런 주입식 교육을 좋아하실까.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나는 이 어린양에게 예수님을 강요해왔구나. 성경 안 읽으면 간식 없다, 날마다 저 작은 숨통을 조이면서.
"성경은 의무가 아니란다. 예수님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면 다시 펼쳐보렴. 네 손으로."
예수님이…… 그리워……? 코웃음이 나려는 걸 고대로는 겨우 참았다. 어젯밤 꿈에도 성경책으로 발리슛을 날리고 만 고대로는 사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이 몸이 죽었는데, 살아 있을 때 성경 열심히 안 읽었다고 펄펄 끓는 지옥 불에 떨어지면, 사수가 책임지실 겁니까?"
타고나길 진중하게 태어난 열 살 고대로가 변성기가 까마득한 하이 톤으로 물었다.
사수는 착잡했다. 성경을 읽지 않아 지옥에 가야 한다면 날마다 성경을 읽어온 이 아이에게 세상은 이미 천국이어야 했다. 읽자고 읽자고 백 번은 불러야 죽상을 하고 나타나 날마다 같은 페이지를 펼치던 이 아이에게 세상은 과연 천국이었을까. 사수는 막 걸음마를 뗀 고대로가 '따뚜'를 발음하며 말을 트던 날을 회상했다.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열 살이 되었는데, 걱정하는 게 고작 죽음의 뒤편이라니. 사수는 자신의 교육 방침이 현재가 아닌 미래, 너무도 아득한 미래를 지향해온 건 아닐까, 탄식했다. 심지어 한글도 성경으로 뗀 고대로였다.
"성경을 읽는데 예수님이 지긋지긋해서 눈물이 났다면, 덮어버린 성경책은 그대로 두어도 무방할 것 같구나. 사실 왕년엔 나도 성경책 좀 덮어봤단다. 그런데도 이렇게 수녀가 되었지. 예수님은 내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한평생 성경을 읽어온 너인데…… 이제 와 미안하지만…… 사실은 나도 잘 몰라. 성경을 읽어서 천국에 갈지, 읽지 않아서 지옥에 갈지, 어쩌면 죽음 뒤에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도. 아직 안 죽어봐서. 대로야, 내가 믿는 건 천국과 지옥이 아니라 언제나 내 편인 예수님이란다. 밤새 코피 쏟으며 성경을 읽으면서도 한순간 예수님을 의심하니 그곳은 이미 지옥이더구나. 하지만 읽기는커녕 성경책을 베개 삼아 잠들면서도 예수님과 함께라고 생각하니 그곳은 이미 천국이었단다. 그래도, 베개로 쓸 성경책은 적당히 넓고 얇은 걸 고르도록 해. 다음 날 목 안 돌아가니까. 너로 인해 비로소 초심을 되새겨보는구나. 대로야, 예수님을 믿는 게 크리스천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나를 믿는 게 진정한 크리스천 아닐까. 아멘."
거두절미하고, 예수님은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말도 못 할 해방감을 느낀 고대로는 곧장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그날부터 축구에만 매달렸다. 이름 날리는 세계적 축구 스타가 되겠다는 꿈에는 비록 발끝도 닿지 못했지만, 자람 보육원 내에서 그는 알아주는 스타였다. 죽기 전까지 보육원 아이들과 땅을 굴렀다. 다만 무의식의 어딘가에 오랜 세월 등한시해온 예수님이 남아 있는지, 골대 앞에서 헛발질을 작렬할 때마다 고대로는 외치곤 했었다.
"주여!"
그런 고대로와 장마철 비 내리듯 땀 흘리며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어린 나는 꼭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사수의 비강요 철학은 대장 조리사에게도 적극 적용되었다. 얼마 전 두 할머니가 대판 하던 그날, 늘그막에 나 원 참 이놈의 집구석 더러워서 나가겠어요, 라는 대장 조리사에게 사수가 대꾸했다.
"모든 것이 주님 뜻이라 여기겠습니다. 저기, 40년 전 들어오셨던 저 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이놈의 집구석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아멘."
사수가 성호를 긋자, 대장 조리사가 뒤질세라 합장을 했다.
"흥! 나무 관세음보살!"
모태 불자인 대장 조리사는 40년 전 자람 보육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어렵게 가져 여덟 달 동안 배 속에 품어온 아기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지 삼 주 만이었다. 젖이 돌았고, 대장 조리사는 그 젖을 말려버리는 대신 나누기로 결심했다. 아직 소화 기관이 무른 아이들에겐 젖을 물렸고, 제법 똥이 굵어진 아이들에겐 밥을 지어 먹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리고, 데이며. 대장 조리사의 자애로움에 감동한 사수는 깊이 머리 숙였다.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사랑이 밥이지요. 자람 보육원의 조리사가 되어주세요. 성심으로 돕겠습니다. 아멘."
"나무 관세음보살……"
웬만큼 세월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늘지 않는 요리 실력에 사수는 낙담하기도 했지만, 늘 늦은 시간까지 신메뉴를 연구하는 진실한 사랑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쌓인 수만의 시간은, 돌쟁이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싱겁지만 그 의도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뜻 모를 맛의 육개장을 탄생시켰다. 그 육개장의 시식회가 열리던 날, 그걸 한 숟갈도 넘기지 못한 채 사수는 촉촉한 눈으로 대장 조리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무소유의 실천이었으므로.
그게 언제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대장 조리사표 육개장을 두 그릇은 너끈히 소화하던 때였다. 사람은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난다는 걸 막 알게 되었을 즈음. 거리에서 들려오는 엄마, 라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게 되던 때. 이 집 기웃, 저 집 기웃,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다 보육원으로 돌아온 나는 사수에게 물었다.
"마리아 님이 예수님 엄마 맞지요?"
묵상 중이던 사수가 실눈을 떴다.
"그렇지."
"사수도 엄마가 있어요?"
"그렇고말고."
"사수는, 내 엄마예요?"
사수가 번개처럼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 얼굴이 사수의 똥그란 눈동자에 비쳤다.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는 그 눈동자 속 나를 보며 나는 내가 지금 기도라는 걸 하고 있구나, 라고 처음 깨달았다. 나는 계속 빌었다. 엄마여라, 엄마여라, 제발 엄마이게 해주세요.
"네가 엄마라고 믿으면 나는 언제나 네 엄마란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새하얘졌다. 그래서 맞는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갈수록 헷갈렸다. 자꾸 침을 삼켰더니 목이 엄청 말랐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혀가 재가 되어 부서졌다. 나는 새하얗게 타버렸다.
당시 오십 대였던 사수는 그때도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베일 틈으로 삐져나온 머리칼을 나오기가 무섭게 밀어 넣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때도 흰머리였다. 그때도, 사수의 외모는 거리에서 본 내 또래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쪽보다는 할머니라고 부르는 쪽에 가까웠다. 나는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사수는 내 엄마일까, 할머니일까, 하고 말이다. 나는 믿어왔다. 나와 사수는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내 엄마의 있음과 없음이 아닌, 사수는 내게 무엇으로 연결되었는지가 궁금해 질문을 던진 거였다. 사수는 내게 엄마로 연결되었을까, 할머니로 연결되었을까, 하고. 비록 겉모습은 할머니 쪽에 가까워도 이왕이면 엄마 쪽이면 좋겠는데, 하고. 사람은 엄마에게서 태어난다니까. 그럼 사수가 나를 낳은 거니까. 그건 믿음이 필요 없는 연결이니까.
결국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왜냐하면 알아듣을 수 없었으니까. 알아듣지 못했다고 사수에게 되묻고 싶었지만 재가 되어 부서지는 혀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으니까. 그것 아닌 다른 말은 해줄 수가 없다고, 사수의 눈동자가 이미 내게 말해주었으니까.
기도는,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