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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9화 (3)잊고 살아온 그걸 잊고 살아온

다행이라면, 호르몬의 고장으로 인해 한층 풍성해진 다리털을 가릴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계절을 막론하고 흐르는 땀 때문에 바지라면 질색인 내가 양복을 입겠다고 결심한 건, 바로 셔츠 때문이었다. 손바닥만 한 치마저고리를 펼치자 그 위로 자아의 잇몸 미소가 스쳤다. 요즘엔 넉넉한 개량 한복도 많다던데, 이 장례식장의 여성용 상주복은 국사 시간에 흑백 사진으로만 접해온 조선 시대풍 한복이었다. 양쪽 어깨에 끈을 걸고 늘어뜨리는 치마는 배를 봉하는 방식이었고, 그 위에 덧입는 앞이 뻥 뚫린 저고리에는 기다란 옷고름이 있었다. 어느 곳에도 틈이, 단추와 단추 사이가 없었다. 그 좁은 안식처마저 잃어버리면 자아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댈 테고, 나는 당연히 상주 임무에 집중할 수 없을 였다. 또한 그곳에서 안정감을 만끽하는 자아와 함께 상주 자리에 서는 것도 그럴듯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의 유일한, 서류상 가족과 함께.


한 벌이라기엔 구성품의 크기가 너무도 제각각이어서 정확한 치수를 알 수 없는 양복은 그럭저럭 내게 맞았다. 자세히 보기 전까진. 교복 셔츠는 내 체형에 맞게 특수 제작한 맞춤복. 상주복 셔츠는 기성복. 상주복 셔츠에 달린 깨알 같은 단추들을 간신히 끼워내자  가슴이 그 거만한 굴곡을 드러냈다. 그 위로 풍채 좋은 선비의 두루마기 같은 웃옷을 치자 그 굴곡이 어느 정도 보완되었다. 완장과 근조리본까지 달고 나니, 제법 듬직한 아들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골반까지 내려 입어봐도 팔부인지 칠부인지 아리송한 바지를 거울에 비춰보며 수염 난 여자, 가슴 큰 남자, 그게 그거 아닌가…… 구시렁거리며 재빨리 욕실에서 나왔다. 난관에 난관을 거치며 나는 한 번 씻으면서 열 번 씻고도 남을 시간을 다. 다행히 효자 고자아는 자리에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



희미하게 자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걸까, 등이 축축했다.


아직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내 몸을 친친 감싸고 있는 이불을 확 걷어 젖혔다. 다행히 울음소리는 이불 밑이 아닌 대기실 문밖에들려오고 있었다. 사수 역시 에 있는지 대기실엔 나뿐이었다. 둘 다 씻고 나온 뒤로도 한참 밥이 오지 않아,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하고 자아 옆에 나란히 누웠었는데…… 내 눈만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자아의 울음소리가 격앙되고 있었다. 마스크 틈새를 단속하며 나는 서둘러 빈소로 나왔다.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우는 자아를 안고 뱅글뱅글 도는 저 할아버지. 우리 집 어르신들의 청일점이자, 우리 집에서 온갖 인기 없는 종교 행사주관해오고 있는 그는 40년째 자람 보육원에서 보조 보육교사로 재직 중인 신부님이다. 신부님 뒤에서 아리랑의 리듬으로 국자를 흔들며 어깨춤을 추는 저 할머니. 그녀는 사수와 함께 40년째 우리 집 식당을 책임지고 있는 자람 보육원의 셰프, 대장 조리사이다. 대장 조리사 옆에서 베일 끝에 감춘 얼굴을 우르르…… 우르르…… 싱겁게 드러냈다가 까꿍…… 까꿍…… 도로 감추는 두 수녀 할머니. 훈풍 수녀회에 소속된 그녀들은 우리 집에서 40년째 사수와 함께 원생들을 돌보고 있는 자람 보육원의 정규 보육교사이다. 가히 장관이었다. 평균 육아 경력 최소 40년에 빛나는 베테랑들이 털을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을 가진 아기 앞에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자비야!"


저쪽 구석에서 사수가 손을 높이 흔들었다. 사수 목소리가  컸다. 대장 조리사 외 세 명이 움찔 뒤를 돌아보았다.


"밥 먹어!"


미리 짜기라도 한 걸까. 대장 조리사 외 세 명이 나를 향해 동시에 외쳤다. 그러곤 태연히 몸을 돌려 각자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들과 나 역시 척하면 척. 너의 피치 못할 사정은 사수에게 낱낱이 전해 들었으니, 자아는 우리에게 맡기고 허기부터 달래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뿐이었다. 그들은 내게 무엇을 묻지 않았고,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움직임이 격해질수록 도리어 허탈해지는 자아의 울음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나는 사수에게 몸을 돌렸다. 사수와 마주 앉은 상에는 저들과 함께 도착한 밥이 차려져 있었다. 수육, 떡, 흰밥 그리고 육개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지런히 정리된 음식들이 보였다. 냉장고 안에는 술과 음료가 반듯이 줄 서 있었고 상마다 깔린 흰 종이 위로는 탑처럼 쌓인 종이컵과 생수병 여러 개, 그 옆으론 수저, 젓가락이 수북했다. 보육원 주방에서 뽑아 왔는지, 주방 한편에 놓인 대장 조리사의 전용 가마솥에선 줄기차게 옅은 김이 피어올랐다. 맛보나 마나 냄새로 짐작 건대,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대장 조리사표 육개장은 엄청 싱거울 거다. 도다리는 짠 음식이라면 질색이었고, 고대로는 주면 주는 대로 먹는 스타일이었다. 대장 조리사는 육개장을 끓이는 날이면 입맛 까탈스러운 도다리 몫을 한솥 따로 끓여 대문짝만하게 적어두곤 했었다.


'다리 목'


이제야 완전히 실감이 났다. 다시는 그들과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게. 그들에게 오렌지를 나눠줄 수 없다는 게. 냉장고 안에 압도적 비율로 줄 선 오렌지 주스를 보니 속시큰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수가 들어 올린 어깨를 툭 떨어뜨리며 성호를 그었다.


"먹자."


사수가 꾹꾹 눌러 뜬 밥 한 숟갈을 육개장에 말았다. 나는 겨우 숟가락을 들었다.  개운하게 눈을 붙인 탓에 공복 시간이 늘어났지만 , 이상하게도 배고픔은 잠들기 전보다 훨씬 덜했다. 실로 충만한 경험이었다.


"어서 한술 떠."


사수가 재촉했다. 내가 쥔 숟가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게, 사수는 내가 진짜 한술을 뜰 때까지 기다릴 작정인 듯했다. 밥 예찬론자의 끈질긴 시선에 못 이겨 나는 건더기를 사발 구석으로 밀곤, 육개장 국물을 한 숟갈 떠 입으로 가져갔다.


잠깐, 뭐지, 이 막막함은?


조금 더. 조금만 더. 수저를 어지간히 밀어 넣었는데도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게 없었다. 육개장 국물은 고스란히 마스크로 스며들었다. 마스크 안으로 알싸한 고추기름 냄새가 퍼졌다. 나는 콧구멍을 바짝 오므렸다. 저 아래에서부터 벌써 심상치 않은 재채기의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잠이 덜 깬 걸까. 설마 긴 꿈인 걸까. 육개장이 순한 맛이어서인지 다행히 재채기는 나오려다 말았지만, 이런 흐리멍덩한 정신력으로 장례식 끝나기 전에 상주 자리에 엉덩이나 붙일 수 있을까. 나는 얼어붙어 눈알만 굴렸다. 밥 먹을 땐 마스크를 벗어야 한다는 걸, 그러니까 내가 마스크를 쓴 채 밥상 앞에 앉았다는 걸 나는 새카맣게 망각하고 있었다. 아주 깊숙이는 수염을.


"마스크 벗어야지이."


어린애의 엉뚱한 실수를 못 견디게 귀여워하듯 사수의 양쪽 광대가 씰룩씰룩했다.


"……"


"에헤이, 어서 벗으라니까."


사수가 다그치며 수저 쥔 손을 내 쪽으로 살짝 뻗었다. 그 순간 나는 두 팔로 가드를 올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쥐고 있던 수저가 천장을 때린 뒤 수육 위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쿠우웅,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저승사자! 지금 나를 향해 손을 뻗어온 시커먼 저것은 아까 내 마스크를 직접 교체해버리겠다고 달려들던 바로 그 저승사자였! 그사이 말끔히 씻고 새 작업복으로 의관을 정제한 저승사자는 더욱더 시커메진 현실감으로 나를 압도했다. 분장으로는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스크린 속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우라였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흔들리는 가드 틈으로 저승사자의 새카만 정수리가 어른거렸다. 몸을 낮추고, 가드를 바로 세우며 나는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유난히 키가 작은 저승사자의 정수리 너머에서 째깍대는 벽시계를 보게 되었는데, 더 물러나려 해도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정지되었다. 가드까지 올려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잠깐 인지되기도 했지만 그 뻘쭘함마저 곧 정지되었다. 둥그런 벽시계 위엔 수염도, 저승사자도, 죽은 그들도 없었다. 그곳을 돌고 도는 건 자아의 잇몸 미소뿐이었다. 저거 저거 고장 난 거 아냐? 자아를 안고 흔들면서 걸을 땐 봐도 봐도 제자리이던 시곗바늘이 어느새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맙소사…… 꼬, 꼬, 꼬르르르륵…… 나는 휘청휘청했다. 밥에 진심인 아기의 밥때가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조금 전 잠에서 깼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방으로 가 분유를 타는 일이었다. 눈뜨자마자 확인한 상주 대기실 벽시계는 약 9시 30분. 조금 늦었지만, 자아의 식사 시간 근처에서 끈질긴 외부 자극 없이 눈뜬 나 자신을 뿌듯해하며 대기실로 나오자, 40년 경력 육아 베테랑 무리에 둘러싸여 우는 자아가 보였다. 자아를 달래느라 늙은 베테랑들은 쩔쩔매고 있었지만, 하나 된 그들을 보는 순간 나는 어쩐지 맥이 풀렸다. 투두툭둑. 내 한 시절이 통째로 삭제된 듯, 정신을 차렸을 나는 어버버버 사수를 향해 걷고 있었다. 진실로, 저들과 함께 도착한 밥이 아닌 사수를 향해. 베테랑 무리에 싸여 울부짖는 자아를 뒤로한 채 앞으로, 앞으로. 수염도 마스크도 잊은 채 앞으로, 앞으로만.


하나로 얽히고설킨 자아와 육아 베테랑 무리는 마치 그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익숙한. 익숙해서 익숙한. 그래서 잊고 살아온 그걸 잊고 살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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