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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9화 (1)우리는 서로의 자랑일 것이었다

이른 밤, 불 꺼진 상주 대기실 작은 창으로 겨울나무들이 어룽어룽 춤을 추었다.


기저귀를 갈고 젖병 하나를 리필한 뒤 자아는 잠이 들었다. 손은 여전히 단추와 단추 사이에 넣어둔 채. 나는 두툼한 요 위에 자아를 누이고 아기의 손끝이 이따금 배털을 스쳐오는, 그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바닥에 누웠다. 먼저 욕실에 들어간 사수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자아를 안고 흔들며 빈소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뱅글거리다 보면 내가 걷는 건지, 떠가는 건지 분간할 수 없게 발목이 시큰거렸다. 이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아기를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이 일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자아는 그 오랜 흔들림 끝에서 언제나 보란 듯 잠이 들었고, 딱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그때 내게는 필연처럼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나아간다는 건 어쩔 수 없이 흔들려야 하는 일일까. 서서 안고 흔들며 걸으라는 건 여전했지만 자아는 이제 바닥에 내려놓아도 울지 않았다. 울고 싶은 건, 바로 나였다.


꼬르르륵…… 꼬르르륵……


조금 전 면도기 한 묶음이 스러져간 코너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배 속에서 진동과 함께 씁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수염을 갖게 된 대신 세상 사는 재미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그 의미에만 중점을 둔다면 그건 실로 오랜만인, 반갑기까지 한 내 안의 떨림이었다. 수염의 등장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던 식욕이 제대로 돌아왔다는 신호.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그들의 사고 소식을 듣기 직전, 물밀듯 되돌아오는 식욕을 느끼며 사수표 제육덮밥을 기다렸을 때도 나는 그 신호의 전조증상조차 느끼지 못했다. 진정한 내 식욕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되돌아오고 있었다.


"……"


그 씁쓸한 소리에 사수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꼬르르륵…… 꼬르르륵……


"그래그래…… 우리 자비…… 그래그래……"


"……"


소리는 빈소 가득 기세를 떨쳤다. 꽤 먼 거리의 사수가 즉각 돌아봤을 만큼.


자고로 허기란 시공간을 뛰어넘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자연재해와 같다는 걸 수염이 나기 전부터도 나는 숱한 공복을 통해 깨달아왔다.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나는 그들을 잃었다. 그 슬픔엔 크기가 없다. 진짜다. 이런 내게 뻥치지 말라는 듯, 속절없이 허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허기에도 크기는 없었다. 진짜다. 그들을 잃은 슬픔과는 무관하게 밀려드는 이 무한한 허기에 어떤 이유가, 핑계가 필요할까. 어제 있었던 그 일엔 대체 어떤…… 착실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 내 머릿속엔 어느새 어제 그 일이 떠올라 있었다. 마스크 안이 찜통 수준으로 달아올랐다. 그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응급실. 나는 그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소리쳤다.


"씨바아아아! 살려내! 살려내! 안 놔? 놔! 놔! 씨바아아아아!"


갑작스러운 비보에 무엇도 자각할 없었다. 정신이 아니었다. 이것을 이유로, 나는 응급실 문턱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아직 나를 뜯어말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놓으라고 놓으라고 미리 몸부림쳤다. 언제나 편이던 그들을 도둑맞았다는 억울함뿐이었다. 순간 나보다 더한 피해자는 세상, 아니 저세상에도 없을 거였다. 막막한 현실 위로,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만간 내게 닥쳐올 게 분명한 그 미래가 뒤덮였다. 잠이 달아나버린 깊은 밤, 베갯잇을 적시며 이불킥을 차며 상상하곤 했던 그 벅찬 미래가. 나는 앞이 깜깜했다. 그들의 죽음을 목도한 지금 내 몸은 가슴 절규했지만, 사실 그 몸 안에선 앞으로 나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 걱정뿐이었다.


그 깜깜한 미래 속에 나는 서 있었다. 빛 한 줄기 없는 암흑천지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쏟아지는 조명, 화려한 악기, 환호하는 관객…… 그렇다. 나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막 해외 순회공연을 마친 참이었다. 연일 매진이던 좌석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고, 이제 드넓은 카네기홀에 남은 건 나와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나는 보육원을 떠나 자립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나에게 자립이란 식구들과의 헤어짐이 아닌 또 다른 만남을 의미했다. 성공한 나와 나의 성공을 바라온 그들과의 만남. 떳떳한 재회. 보나 마나 나는 내 데뷔 소식을 그들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이었고, 감격한 그들은 밤새 내 데뷔 무대를 돌려 볼 것이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우리는 결국 서로의 자랑일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세상에 없고, 나는 그들에게 무엇도 자랑할 수 없게 되었다. 뻔하던, 그래서 지긋지긋하던 그들의 응원. 그들은 나를 응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응원은 내 성공과는 무관했다. 각종 음반 차트 24주 연속 1위? 세다 죽을 엄청난 돈? 뭐, 그들 목에 주렁주렁 걸릴 금송아지? 정기 크루즈 여행? 금의환향? 그들 없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그들과 함께 내 성공의 이유도 죽어버린 듯했다. 나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하얀 천에 덮인 그들을 향해 나는 그렇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막 사망 선고가 내려진 때였고, 정확히 말하면 사수가 봉안당은커녕 아직 그들의 장례식장도 계약하지 않은 때였다. 우리 집 어르신들은 본인들 말마따나 대부분 명이 쇠심줄처럼 질겼다. 그래서 훈풍 수녀회의 막내는 그중 허리가 가장 굽은 칠십 살 사수였다. 이유라면 이것을 이유로 나는 봉안당이라면 아직 그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지만 응급실이 떠나가게 통곡하면서도, 위치도 구조도 미상인 그들의 봉안당에 꽃을 놓고 돌아서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것엔 별도의 계산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 상상 속에서 그들의 봉안당은 자동으로 배경 처리되어 희뿌옜고, 나만 고화질이었다. 나는 거기서도 울고 있었다. 상상 속 울음이 거세질수록 응급실 문턱에 주저앉은 현실 속 내 몸부림 또한 거세졌다. 내 앞뒤로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자동문이 서글픈 소리를 내며 채 열리지 못하고 채 닫히지 못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게 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아랑곳없이 쌍욕을 퍼부을 뿐이었다. 낡고 작은 그들의 자동차를, 피범벅이 된 채 멈춰진 의료진의 두 손을, 큰 자동차와 작은 자동차가 부딪혀버린 그 공교로운 타이밍을 탓할 뿐이었다. 사수 앞에서. 바로 어제.


그런데 오늘, 배가 고팠다. 정식으로.


영정 사진 속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는데, 면도기를 보내고 나서부턴 허한 기운과 함께 배고픔도 용솟음쳤다. 내 귀에만 들릴 만큼 미미하던 공복의 소리는 어느새 빈소 전체를 공명했다. 자아에게 집중해보아도, 고였던 눈물은 흔적도 없이 말라버렸지만 배고픔은 끝내 그대로였다.


물론 하루 넘게 자지도 씻지도 먹지도 못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하루 반나절 이상을 굶은 건 내 인생 최장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건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기록 보유자인 내가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외부적으로 참은 것일 뿐, 내 내부의 톱니바퀴는 매우 정확한 속도로 잘도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꼬르르륵…… 꼬르르륵…… 꼬르르르륵……


자아 옆에 누워 눈만 끔뻑끔뻑하는 내게 그 비공식 기록의 유일한 목격자인 사수가 말했다.


"먼저 씻으마. 그리고 저…… 그…… 그 말이지…… 그…… 뭐였더라? 아하! 맞다! 밥! 밥은, 지금 오고 있다더구나? 한숨 돌리렴. 밥 먹게. 행여 한숨 자지 말고."


점점 짧아지는 소리의 간격 때문일까. 무의식에 늘 밥이 있는 사수는, 그 밥을 꼭 하나님 아닌 초면의 신 대하듯 모른 체하며 욕실로 들어간 참이었다. 물론 그게 나를 향한 사수의 배려이자 걱정이라는 걸 나도 모르진 않았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사수의 엉성한 그것은 지금의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꼬, 꼬르르르륵……


"잘 거면 밥 먹고 자."


사수가 욕실 문을 닫기 전에 덧붙였다.


'누가 물어봤냐고요! 그놈의 밥! 밥! 밥!'


나에게 죽음과 허기는 동등한 슬픔일까. 그들의 죽음 앞에 엎드린 내 슬픔은 고작 하루 반나절 치의 허기에 불과한 것일까. 왜 사수 배 속에선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걸까. 나는 입술을 깨물며 모래를 삼킨 듯 꺼끌꺼끌한 명치께를 움켜쥐었다. 


쏴아아-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우당탕탕 우당탕탕 뭘 자꾸 놓치는 소리도. 아후…… 조마조마하게 면도하는 것도 아닐 텐데 뭘 그렇게 떨어뜨리는지…… 사수는 혼자 씻으면서 삼대가 한꺼번에 씻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나는 자아가 깰까 봐 조마조마했다. 재빨리 옆으로 돌아누워, 자아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 자아의 심장이 얕고  빠르게 뛰었다. 여기 있어. 나는 손바닥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손등이 자아의 박동을 따라 물결쳤다.


꼬르르르르륵……


쏴아아아아아……


그런데,


우당탕탕탕……


그러고 보니,


쏴아아아아아……


자식을 잃어버린 사수였다.


쏴아아아아아……꼬르르르르륵……


그러고 보니,


우당탕탕탕……


사수는,


꼬르르르르륵……


남아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내가 잃어버린,


쏴아아아아아……


고향에.


우당탕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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