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밤, 불 꺼진 상주 대기실 작은 창으로 겨울나무들이 어룽어룽 춤을 추었다.
기저귀를 갈고 젖병 하나를 리필한 뒤 자아는 잠이 들었다. 손은 여전히 단추와 단추 사이에 넣어둔 채. 나는 두툼한 요 위에 자아를 누이고 아기의 손끝이 이따금 배털을 스쳐오는, 그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바닥에 누웠다. 먼저 욕실에 들어간 사수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자아를 안고 흔들며 빈소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뱅글거리다 보면 내가 걷는 건지, 떠가는 건지 분간할 수 없게 발목이 시큰거렸다. 이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아기를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이 일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자아는 그 오랜 흔들림 끝에서 언제나 보란 듯 잠이 들었고, 딱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그때 내게는 필연처럼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나아간다는 건 어쩔 수 없이 흔들려야 하는 일일까. 서서 안고 흔들며 걸으라는 건 여전했지만 자아는 이제 바닥에 내려놓아도 울지 않았다. 울고 싶은 건, 바로 나였다.
꼬르르륵…… 꼬르르륵……
조금 전 면도기 한 묶음이 스러져간 코너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배 속에서 진동과 함께 씁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수염을 갖게 된 대신 세상 사는 재미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그 의미에만 중점을 둔다면 그건 실로 오랜만인, 반갑기까지 한 내 안의 떨림이었다. 수염의 등장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던 식욕이 제대로 돌아왔다는 신호.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그들의 사고 소식을 듣기 직전, 물밀듯 되돌아오는 식욕을 느끼며 사수표 제육덮밥을 기다렸을 때도 나는 그 신호의 전조증상조차 느끼지 못했다. 진정한 내 식욕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되돌아오고 있었다.
"……"
그 씁쓸한 소리에 사수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꼬르르륵…… 꼬르르륵……
"그래그래…… 우리 자비…… 그래그래……"
"……"
소리는 빈소 가득 기세를 떨쳤다. 꽤 먼 거리의 사수가 즉각 돌아봤을 만큼.
자고로 허기란 시공간을 뛰어넘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자연재해와 같다는 걸 수염이 나기 전부터도 나는 숱한 공복을 통해 깨달아왔다.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나는 그들을 잃었다. 그 슬픔엔 크기가 없다. 진짜다. 이런 내게 뻥치지 말라는 듯, 속절없이 허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허기에도 크기는 없었다. 진짜다. 그들을 잃은 슬픔과는 무관하게 밀려드는 이 무한한 허기에 어떤 이유가, 핑계가 필요할까. 어제 있었던 그 일엔 대체 어떤…… 착실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 내 머릿속엔 어느새 어제 그 일이 떠올라 있었다. 마스크 안이 찜통 수준으로 달아올랐다. 그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응급실. 나는 그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소리쳤다.
"씨바아아아! 살려내! 살려내! 안 놔? 놔! 놔! 씨바아아아아!"
갑작스러운 비보에 무엇도 자각할 수 없었다. 내 정신이 아니었다. 이것을 이유로, 나는 응급실 문턱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아직 나를 뜯어말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놓으라고 놓으라고 미리 몸부림쳤다. 언제나 내 편이던 그들을 도둑맞았다는 억울함뿐이었다. 이 순간 나보다 더한 피해자는 이 세상, 아니 저세상에도 없을 거였다. 이 막막한 현실 위로,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만간 내게 닥쳐올 게 분명한 그 미래가 뒤덮였다. 잠이 달아나버린 깊은 밤, 베갯잇을 적시며 이불킥을 차며 상상하곤 했던 그 벅찬 미래가. 나는 앞이 깜깜했다. 그들의 죽음을 목도한 지금 내 몸은 가슴 치며 절규했지만, 사실 그 몸 안에선 앞으로 나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쭉 내 걱정뿐이었다.
그 깜깜한 미래 속에 나는 서 있었다. 빛 한 줄기 없는 암흑천지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쏟아지는 조명, 화려한 악기, 환호하는 관객…… 그렇다. 나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막 해외 순회공연을 마친 참이었다. 연일 매진이던 좌석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고, 이제 드넓은 카네기홀에 남은 건 나와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나는 보육원을 떠나 자립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나에게 자립이란 식구들과의 헤어짐이 아닌 또 다른 만남을 의미했다. 성공한 나와 나의 성공을 바라온 그들과의 만남. 떳떳한 재회. 보나 마나 나는 내 데뷔 소식을 그들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이었고, 감격한 그들은 밤새 내 데뷔 무대를 돌려 볼 것이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우리는 결국 서로의 자랑일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세상에 없고, 나는 그들에게 무엇도 자랑할 수 없게 되었다. 뻔하던, 그래서 지긋지긋하던 그들의 응원. 그들은 나를 응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응원은 내 성공과는 무관했다. 각종 음반 차트 24주 연속 1위? 세다 죽을 엄청난 돈? 뭐, 그들 목에 주렁주렁 걸릴 금송아지? 정기 크루즈 여행? 금의환향? 그들 없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그들과 함께 내 성공의 이유도 죽어버린 듯했다. 나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하얀 천에 덮인 그들을 향해 나는 그렇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막 사망 선고가 내려진 때였고, 정확히 말하면 사수가 봉안당은커녕 아직 그들의 장례식장도 계약하지 않은 때였다. 우리 집 어르신들은 본인들 말마따나 대부분 명이 쇠심줄처럼 질겼다. 그래서 훈풍 수녀회의 막내는 그중 허리가 가장 굽은 칠십 살 사수였다. 이유라면 이것을 이유로 나는 봉안당이라면 아직 그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지만 응급실이 떠나가게 통곡하면서도, 위치도 구조도 미상인 그들의 봉안당에 꽃을 놓고 돌아서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것엔 별도의 계산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 상상 속에서 그들의 봉안당은 자동으로 배경 처리되어 희뿌옜고, 나만 고화질이었다. 나는 거기서도 울고 있었다. 상상 속 울음이 거세질수록 응급실 문턱에 주저앉은 현실 속 내 몸부림 또한 거세졌다. 내 앞뒤로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자동문이 서글픈 소리를 내며 채 열리지 못하고 채 닫히지 못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게 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아랑곳없이 쌍욕을 퍼부을 뿐이었다. 낡고 작은 그들의 자동차를, 피범벅이 된 채 멈춰진 의료진의 두 손을, 큰 자동차와 작은 자동차가 부딪혀버린 그 공교로운 타이밍을 탓할 뿐이었다. 사수 앞에서. 바로 어제.
그런데 오늘, 배가 고팠다. 정식으로.
영정 사진 속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는데, 면도기를 보내고 나서부턴 허한 기운과 함께 배고픔도 용솟음쳤다. 내 귀에만 들릴 만큼 미미하던 공복의 소리는 어느새 빈소 전체를 공명했다. 자아에게 집중해보아도, 고였던 눈물은 흔적도 없이 말라버렸지만 배고픔은 끝내 그대로였다.
물론 하루 넘게 자지도 씻지도 먹지도 못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하루 반나절 이상을 굶은 건 내 인생 최장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건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기록 보유자인 내가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외부적으로 참은 것일 뿐, 내 내부의 톱니바퀴는 매우 정확한 속도로 잘도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꼬르르륵…… 꼬르르륵…… 꼬르르르륵……
자아 옆에 누워 눈만 끔뻑끔뻑하는 내게 그 비공식 기록의 유일한 목격자인 사수가 말했다.
"먼저 씻으마. 그리고 저…… 그…… 그 말이지…… 그…… 뭐였더라? 아하! 맞다! 밥! 밥은, 지금 오고 있다더구나? 한숨 돌리렴. 밥 먹게. 행여 한숨 자지 말고."
점점 짧아지는 소리의 간격 때문일까. 무의식에 늘 밥이 있는 사수는, 그 밥을 꼭 하나님 아닌 초면의 신 대하듯 모른 체하며 욕실로 들어간 참이었다. 물론 그게 나를 향한 사수의 배려이자 걱정이라는 걸 나도 모르진 않았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사수의 엉성한 그것은 지금의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꼬, 꼬르르르륵……
"잘 거면 밥 먹고 자."
사수가 욕실 문을 닫기 전에 덧붙였다.
'누가 물어봤냐고요! 그놈의 밥! 밥! 밥!'
나에게 죽음과 허기는 동등한 슬픔일까. 그들의 죽음 앞에 엎드린 내 슬픔은 고작 하루 반나절 치의 허기에 불과한 것일까. 왜 사수 배 속에선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걸까. 나는 입술을 깨물며 모래를 삼킨 듯 꺼끌꺼끌한 명치께를 움켜쥐었다.
쏴아아-
곧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우당탕탕 우당탕탕 뭘 자꾸 놓치는 소리도. 아후…… 조마조마하게 면도하는 것도 아닐 텐데 뭘 그렇게 떨어뜨리는지…… 사수는 혼자 씻으면서 삼대가 한꺼번에 씻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나는 자아가 깰까 봐 조마조마했다. 재빨리 옆으로 돌아누워, 자아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다. 자아의 심장이 얕고 빠르게 뛰었다. 여기 있어. 나는 손바닥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내 손등이 자아의 박동을 따라 물결쳤다.
꼬르르르르륵……
쏴아아아아아……
그런데,
우당탕탕탕……
그러고 보니,
쏴아아아아아……
자식을 잃어버린 사수였다.
쏴아아아아아……꼬르르르르륵……
그러고 보니,
우당탕탕탕……
사수는,
꼬르르르르륵……
남아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내가 잃어버린,
쏴아아아아아……
고향에.
우당탕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