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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8화 (3)이 거대하고 투명한 테두리 안에서

내 어딘가에 남아 있는 줄은 알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 줄 몰라 영영 묻어버리기로 결심한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았달까. 열세 살 그때, 나는 그들의 입양 의도를 해독할 수 없었다. 열여덟 살이 된 지금 되새겨보아도 일부 아리송한 부분들이 있다. 털이라는 복병이 끼어들긴 했지만 스무 살만 되면, 자립만 하면, 대형 기획사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나는 꽃길만 걸을 테니까. 그럴 것만 같으니까.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온전히 와닿는 단 하나는, 그들은 내게 진실을 말했고 나는 그들의 진실을 믿었다는 다. 오렌지 포함, 어쩌다 혼자서 맛있는 걸 먹을 때면 내 머릿속엔 모종의 이유로 사수와 그들 부부가 떠올라 있었다. 모종의 이유는 그 음식에 대한 선호도나 그때의 입맛 강도 등에 따라 왕왕 달라지기도 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그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시작이 기억나지 않는, 아주 작았을 때부터 확신해 왔다. 그들과 나는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서부터 연결된 게 분명하다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거대하고 투명한 테두리 안에서.


"제게 상주 자리를 허락해주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내가 짐짓 점잖게 묻자, 사수가 굽은 허리를 벌떡 펴고 나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게 내 입에서 이렇게 격식 있는 말투가 튀어나온 것 또한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실전엔 처음 적용해보는, 사수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청유형이었다. 처음인데도 입에 착 감기는 게, 써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것은 이미 내 뼛속 깊이 스며든 듯했다.


"쉽지 않을 텐데."


너무 편 나머지 뒤쪽으로 휘어져버린 허리에 단단히 힘을 실으며 사수가 말했다.


"엎어져 자는 것보단, 뭐라도 시도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쑥 들어간 사수의 눈두덩에 겹겹 주름이 졌다. 그 주름을 폈다 접었다 하며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사수는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따봉, 따봉, 내게 쌍따봉까지 날려주었다. 그것은 간곡한 허락이었다. 아마도 사수는 내가 '엎어져 자는 것보단'이라고 입을 뗀 순간 이거 이거 더는 말려선 안 된다, 이미 단념했을 다. 나는 뭐든 많으니까. 살도. 땀도. 털도. 잠도……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자는 나 때문에 사수는 내가 잠든 그곳 언저리에서 늘 촉각을 곤두세워 왔다. 알아서 일어나면 다행인데 나는 뭐가 깨우기 직전까지 잔다. 이 나이 되도록 스스로 일어나본 역사가 없다. 생후 2일 차에 자람 보육원 대문 앞에서 발견된 내가 미동조차 없어서 큰일이 난 건 아닐까, 하고  코에 손가락을 보았는데, 콧김이 이렇게 뜨거운 건 처음이어서 손가락을 덴 줄 알고 사수가 큰소리로 욕을 하며 베일이 벗겨지도록 펄쩍펄쩍 뛰었다는 일화는 18년이 지난 지금도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수는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온 거라 해명했지만 알고 보니 사수의 욕은 자기만 모르게 나오고 만 거였다나…… 사수가 펄쩍펄쩍 뛰던 그때 생모의 편지에 싸여 죽은 듯 자던 나는 정확히 뭐에 놀란 건진 몰라도 쩌렁쩌렁 울음을 터트렸고 말이다. 사수, 알람, 볕, 밥 냄새…… 지금껏 나의 기상은 끈질긴 외부 자극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여름 해수욕장 모래 위에서 엎어져 자다가 앞뒤로 고르게 화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지옥 불 같았다는 그날의 열기에 비하면 장례식장의 수면 환경은 거의 천국급이 아닐까, 사수는 일찌감치 결론 내린 듯했다.


"저…… 대체 상주는 누가……"


아아, 참, 아직 거기 계셨지…… 부쩍 퀭해진 관계자가 펜 끝을 똑딱거리며 재촉했다.


"상주는 저 고, 자, 비, 고인분들의 딸입니다. 아, 상복은 제가 입을 한 벌이면 됩니다. 특대형으로, 부탁드립니다."


사수는 다른 수녀복으로 갈아입을 때를 제외하곤 수녀복을 벗는 법이 없으니까.


"그럼 이만……"


내가 딸, 이라고 못을 박았음에도 관계자는 더는 소스라치지 않고 재빨리 수첩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먹구름뿐이던 창밖이 아예 깜깜해져 있었다. 밤이었다. 관계자가 초조하게 벽시계를 힐끔거리며 필기도구를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는 퇴근 시간을 놓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자아가 젖병을 비운 지도 한참이었다. 나는 서둘러 자아를 어깨 위로 안아 올리곤,  손바닥에 착 감겨오는 아기의 등을 두드렸다. 트림 유도. 기본 중의 기본. 육아의 첫 단계. 이 작은 트림들이 모이고 모이면 아기는 비로소 튼튼한 소화기관을 갖게 될 것이라고, 사수는 매 끼니때마다 내게 일러주곤 했었다. 툭 치면 탁 나오게.


손만큼은 누구보다 작은 나, 고자비. 내 손 하나에도 차지 않는 고자아 여린 등. 그 등을 가만가만 노크하듯 두드리며 나는 관계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펴 귀가하시라, 모름지기 이제는 그들의 어엿한 상주로서 그에게 인사라도 건네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는 반쯤 벌린 입을 또다시 다물고 말았다.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온데간데없던 그의 말끝처럼.




*



"저……!"


어쩐 일인지 빈소 밖으로 사라졌던 관계자가 금방 되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갖가지 물품이 가득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장례식장 측에서 유족에게 제공하는 일회용품인 듯했다.


'그래그래, 인생은 일회용이지……'


나는 쓰게 입맛 다시며 그가 든 물품 바구니를 살펴보았다. 비누, 치약, 칫솔, 샴푸, 면도기……


'그래그래, 면도기는 일회용이지…… 읍! 면도기……? 면도기……!'


숨어서 면도해야만 하는 여자의 무의식일까. 바구니 가장자리로 비죽 솟은 면도기의 푸른빛 손잡이를 발견한 순간 반드시 내가 저 바구니를 넘겨받아야 한다는 어떤 집념이 번쩍, 하는 빛의 형태로 뇌리를 관통했다. 그러나  관계자는 때마침 자기 곁을 지나던 사수에게 바구니를 내밀었고, 나는 푸른빛 손잡이를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속도와 강도로 자아의 등을 두드리며 트림을 유도하는 걸 잊진 않았다.


"그럼 진짜 이만……!"


사수에게 바구니를 넘긴 관계자가 쌩 빈소를 빠져나갔다. 얼떨결에 바구니를 건네받은 사수가 멍한 얼굴로 빈소 입구를 건너다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스윽 시선을 돌린 사수가 물품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바구니를 뒤적였다. 나는 책이라곤 만화책밖에 없는 내 가방 검사를 지켜보는 양 두근거렸다. 바구니를 뒤적이던 사수가 별안간 납빛이 되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쿵쾅쿵쾅쿵쾅 내 심장이 오고무를 추며 북을 쳐댔다. 쿠쿵. 하아, 그냥 있지, 사수는 이번에도 입을 열었다. 점처럼 작아져 잘 보이지도 않는 관계자를 향해.


"봐! 여봐! 어이! 어이! 어이이이!"


사라 수녀님의 입에서 긴 세월 묵혀놓은 듯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쩌렁쩌렁한 게 안 그래도 동굴 속 같은 이곳에서 메아리 한번 끝장이었다. 다 나온 트림도 도로 들어갈 듯했다. 소리에 놀란 자아가 끅끅거렸다. 복도 끝까지 멀어졌던 관계자는 어느새 숨을 헐떡이며 되돌아와 있었다. 어이, 라고 불리기에 관계자는 사수만큼이나 주름이 많았다.


"상황이 급한 나머지…… 조금 전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 면도기는 다른 손님께 드리시지요. 저희 측은 엄마와 딸, 여자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아들은 아직 어려서요."


사수가 바구니에서 면도기를 꺼내 관계자에게 내밀었다. 트림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지 자아가 용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더 힘을 실어 자아의 등을 두드리며 사수의 손에서 관계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면도기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제 발로 굴러들어 온 면도기를 반납하다니. 과연 절약을 하나님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는 사수다웠다.


"하이유우…… 놀래라…… 누가 죽기라도 한 줄 알고……"


무심하게 면도기를 받아 든 관계자가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그가 도로 빈소 밖으로 뛰어나갔다. 누가 봐도 전속력이었다.


"저기효오오오옹……"


그 순간 내가 무슨 소리를 냈다. 벌써 저만큼 멀어진 관계자에게 들릴 리 없는, 생소하고도 가녀린 음성이었다. 소리의 주인에게도 낯선 그 소리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 내려해도 어떻게 내는 건지 알  없었다. 용을 쓰는 자아를 안고 둥가둥가 몸을 흔들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떠나가는 면도기를 그대로 보내주는 것뿐이었다. 끅끅대던 자아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관계자의 손에 들린 면도기가 복도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한 묶음이었다.


면도기 한 묶음의 잔상이 떠다니는 그 코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일정한 속도와 강도로 자아의 등을 두드렸다. 어쩐지 나오고도 남았을 트림이 감감무소식이다, 했다. 본의 아니게 선잠에서 깨어 허겁지겁 젖병을 비운 자아는 내내 속이 더부룩했던 모양이었다. 울음소리마저도 꽉 막혀 있었다. 나는 얼른 자아를 이쪽 어깨에서 저쪽 어깨로 옮기곤, 사수에게 극비리에 전수받은 기밀이자 트림시키기 심화 과정 3장 3절의 핵심인 '해도 해도 안 되면' 기술을 시도해보았다. 이 최후의 기술을 실전에 적용하는 것 역시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술 자체가 워낙 극비이므로 자세한 과정을 발설할 순 없지만 그건, 아기의 트림은 일방적으로 두드린다고 나오는 게 아니며 내가 두드린 만큼 상대에게 무언가를 내어줄 각오가 되었을 때 비로소 먹힐까 말까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내게 남겼다. 나는 만신창이였다. 끄워워어어어억- 머지않아 내 인생을 통틀어 최고로 시원한 트림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일까? 끄억끄억끄억- 태어난 지 한 달 된 자아가 십 년 묵은 체증이 가신 듯 잇몸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웃었다. 뭐, 그저 다행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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