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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Oct 27. 2024

8화 (1)밖으로는 꺼낼 수 없어 안으로만 굴려온 말

"저……"


앉아서 숨 좀 돌리는가 싶었는데 누군가가 빈소로 들어섰다. 아까 잠시 스친 장례식장 관계자였다.


"심심한 위로의 말씀……"


사수가 관계자를 향해 성호를 그었다.


"몇 가지 여쭐 게……"


수첩과 펜을 세우며 관계자가 빈소를 훑었다.


"안내 화면에 띄울 유족은…… 상복은 몇 벌이나……"


끼어들 분야가 아닌 것 같아, 나는 반쯤 벌렸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두 아이 모두 당장 연락이 닿는 피붙이는 없습니다. 제가 아이들 어머니와 다름없으니 저를 유족으로 올려주십시오."


끙, 사수가 말끝에 신음을 흘렸다.


"아…… 예…… 성함이……"


"아…… 예…… 정, 말, 임, 괄호 열고 '사라' 괄호 닫고. 보시다시피 사라는 수도명입니다."


말임? 정말임? 뭔 말임?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사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수가 콧잔등을 찡긋했다.


'정 사라'가 사수의 본명인 줄 알고 18년을 살아왔. 18년 내내 누구도 사수를 말임이라 부르지 않았으니까. 어쩐지, 내가 아는 수녀님들은 늙으나 젊으나 하나같이 개방적인 이름을 갖고 있더라니.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멋들어진 이름들로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자 이름에 아들 자(子) 자가 난무했다던 때 태어난 칠십 살 사수. 나는 지금껏 사수 역시 다른 수녀님들과 마찬가지로 시대를 앞서 나간 이름을 가진 것뿐이라 여겨왔다. 물론 '사라'라는 고급스러운 이름은 외국물 좀 먹은 유명한 작명가 혹은 작명에 조예가 깊은 한 '인간'의 솜씨일 거라고 말이다. 사수는 '사라'라는 자신의 이름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계획해 놓으신 작품이 틀림없다 주장했지만, 나는 코웃음치곤 말았다. 번드르르한 이름만 덜렁 던져주는 신이라니. 신은 없는 게 분명했. 그런데 이제 와 말임…… 정말임이라니…… 신은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 집, 그러니까 자람 보육원은 사수가 수장으로 있는 '훈풍 수녀회'가 운영한다. 지금껏 독실한 크리스천들의 보살핌 속에 살아왔지만 누구도 내게 독실한 크리스천의 삶을 강요하지 않았다. 날마다 예수님을 부르짖을 뿐, 그들은 내게 예수님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 나는 꽤 오랫동안 예수님을 예 씨 성에 수 자  자를 쓰는 사람, 멀리 살아 자주 만나지 못하는 그들의 친구쯤으로 짐작했었다. 더듬더듬 한글이라도 읽게 되고, 어느 정도 눈치가 생기고 나서야 예수님의 실체를 나 알아서 깨쳤다. 정황상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친구였다. 물론 나는 예수님의 실체를 깨닫자마자 그와 절교했지만 말이다. 이 지경이었으니 수도명이란 게 있는 줄은 당연히 몰랐다. 나 소피아, 엄 마가렛, 손 세실, 황 마리아나, 정 사라…… '자비'라는 멀쩡한 이름 대신 '고자'로 불려야 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부르나 저렇게 부르나 제 기능을 다하는 그들의 이름은 마치 여리여리한 그 아이돌의 춤선과 같았다. 내게 식구들의 이름은,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대대손손 물려주고픈 우리 집만의 화려한 문화유산이었다.


"그리고 여기 고, 자, 아."


정말ㅇ…… 사수가 내 품에 안긴 자아를 가리키며 관계자에게 말했다. 포만감 때문일까. 자아는 내가 굳이 서서 안고 흔들면서 걷지 않아도 저 알아서 잠에 빠져들 듯 나른한 얼굴이었다.


"아…… 고, 자, 아. 고인들과의 관계는……"


"아들입니다."


관계자의 시선이 바로 나를 향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게, 그는 이미 나를 누군가의 아들로 확신한 듯했다. 나도 뭐, 이제 이런 시선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뭔가 다른 게 있을 줄 았는지, 내 아래쪽에서 나붓나붓하는 교복 치마를 발견한 그가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났다. 뭐, 숱하게 겪어온 이런 반응 역시 대수로울 건 없었으므로 나는 멀뚱멀뚱 관계자를 올려다보았다.


"혹, 따, 따님이신지……"


관계자가 내 위와 아래를 빠르게 번갈아 보며 물었다.


"딸이라뇨! 아들입니다! 제가 똑똑히,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저도 처음엔 딸인가, 싶어 저 조막만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었지요. 이렇게 오밀조밀 귀염이 넘치니……"


관계자의 의중을 정확히 벗어난 사수가 넌지시 자아를 내려다보았다. 따스한 봄날 강물에 이는 잔물결이 사수의 눈에서 반짝였다. 이따금 나를 공주님이라 부를 때도 사수는 딱 저 눈빛이다. 왕자님이라 불러놓고 멋쩍게 베일 속 정수리를 긁을 때는 더더욱.


"아니…… 아드님이 어쩌자고 치마를……"


사수와 관계자는 아예 멀어져 갔다.


"저 말고 이 아기요. 제게 안긴 이 아기가 고인분들의 아들, 고자아입니다."


내가 나섰다. 빈소를 휩싸는 풍부한 저음에 관계자는 또 한 번 소스라쳤다.


"아…… 천만다행입니…… 아니, 저, 그게…… 그나저나 세상에…… 이 어린애를 두고……"


관계자가 말끝에 선명하게 혀를 찼다.


쯧, 순간 정적이 일었다.




*




"그럼…… 상주는 어느 분이……"


적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취업이었을까. 혹은 확고한 사명감일까. 장례식장 관계자는 곧 숨이 넘어갈 듯 말 듯 끝이 꺼져가는 말투를 구사했다. 그가 삼키는 말끝들이 마치 아껴먹으려고 남겨두었는데 상해버린 음식 같아, 나는 아까부터 체한 듯 속이 더부룩했다. 강제 기상 상태에서도 거뜬히 식사를 마치고 자울자울 하던 자아 역시 뭐가 언짢은 건지 갑자기 성난 두더지처럼 내 품을 파고들었다.


"상주는, 피를 나눈 가족만 가능한가요?


나는 관계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법적 의무는 아닙니다만…… 대부분 친족이 상주 역할을…… 남편, 아들, 손자, 사위……"


"남자만 가능한가요?"


두면 알아서 꺼지겠지만, 나는 관계자의 말을 잘랐다. 피를 나누지 않은 가족에게도 상주 자격은 주어지는 모양이었다. 남편과 피를 나눠서 가족인 아니니까. 듣는다 해도 그건 여자인 나와는 무관한 호칭들일 듯했다.


"남성 가족이 없는 경우…… 여성분도…… 드물게……"


관계자가 다 꺼지고 불씨만 남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드물게. 그건 어떻든 존재한다는 뜻. 그러므로 그건 상주와 성별은 무관하다는 증거. 더 물을 것도 없었다. 밖으로도 안으로도 나는 그들의 상주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실 나는 이미 도다리와 고대로의 법적 가족이었다. 세상엔 둘도 없을, 유일한 형태의 가족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할 법적 증거가 없을 뿐.


"우린 가족이야?"


놀이공원의 그날, 붉은 노을을 가로지르며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가 불쑥 물었다.


"가족? 당연하지!"


"가족? 물론이다!"


도다리와 고대로가 들뜬 목소리로 사이좋게 답했다. 45도, 무언의 화해 뒤부터 그들은 회전목마만 이십 번 넘게 타는 등 나보다 더 신나 있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로를 가족이라 여겨왔기에 내가 던진 저 질문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감탄사처럼 제멋대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실컷 웃고 떠든 뒤라 기진맥진했지만, 나는 어쩐지 놀이공원으로 출발할 때보다 더 설레었다. 고대로는 도다리가 탔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뒤 시동을 걸었고, 우리의 안전벨트까지 챙겼다. 우리는 서두를 것 없이 집으로 향했다. 우리의 낡은 자동차는 언제나처럼 아늑했고, 그 안을 감도는 공기는 로봇들의 화해로 인해 비로소 사람 냄새가 폴폴 났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탄력 받은 김에 그 아이 이야기까지 할까, 했다가 형편없는 그들의 상담 실력을 떠올리곤 들입다 고개를 저었던 기억이 있다. 그들과 함께, 라는 뻔한 그 순간이 유난히 안전하게 느껴졌다. 나는 괜스레 들떴다. 자꾸 뭔가를 조르고 싶었다. 나를 사랑해? 진짜 사랑해? 라고 물어오는 보육원의 동생들처럼.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그래도 우린 가족이야?"


나는 두 발을 깡총 거리며 또 물었다.


"자비, 중요한 건 피가 아니라 나눈다는 것 아닐까. 나누고 싶은 거. 내가 가진 무언가를 막 퍼주는데도 늘 덜 준 것만 같은 거."


허스키한 내 목소리와는 정반대인 톤. 찌를 듯한 하이 의 소유자 고대로가 그 목소리를 촤악 내리 깔며 했다. 본래의 하이 톤에 막혀 제대로 깔리진 못했다. 그의 목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도발적인 소리가 났다.  소리에 분위기만 치익 가라앉았다. 하나도 멋없는데 한없이 멋있는 척하는 건 고대로의 취미였다. 나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던 도다리가 그의 뒤통수를 향해 떨떠름하게 입꼬리를 조금 떨곤, 옆에 놓인 아이스박스를 뒤지며 말했다.


"간식, 놀이공원에서 주려 했는데 놀다가 깜빡했어."


아이스박스에서 나온 건 동그란 모양 그대로 껍질이 벗겨진 오렌지였다.


"우워워워워어!"


나는 탄성을 질렀다. 열세 살 평생 그렇게 크고 향기로운 오렌지는 처음이었다. 나는 오렌지 귀신이었고 그러므로 하나하나 뜯어먹을 시간에 통째로 와그작 깨물어 두 방에 끝내는 걸 좋아했다.


"난 오렌지만 보면 자비 네가 생각나."


도다리가 내미는 오렌지를 두 손에 공손히 받아 들며 나는 뭔가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오렌지와 함께, 도다리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심정이 미세하게나마 전달되어 오는 것도 같아서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오렌지를 혼자 다 먹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 정도? 나는 도다리와 고대로의 입에 오렌지를 먼저 한 알씩 넣어주었다. 오렌지를 나누다니,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런 내가 다 큰 것 같다며 감격에 겨워했지만, 사실 나는 조금 양심에 찔렸다.


그들 입으로 들어간 건 가장 작은 알들이었다. 이걸 떼자니 저게 큰 것 같고, 저걸 떼자니 이게 큰 것 같았다. 일부러 작은 알을 고른 건 아니었지만 일부러 큰 알을 남겨둔 건 양심상 맞았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나는 오렌지 귀신. 내가 눈앞의 오렌지를 바라만 보고 있는 , 오렌지는 물론 내 양심에 대한 모독이었다. 어금니 사이에 고인 침과 함께 나는 오렌지를 힘껏 베어 물었다. 반이 날아갔다.


"우리, 법적으로도 가족이 되는 건 어떨까."


멋있는 척하고 싶어 하는 목소리와는 반대로 하나도 멋없게 오렌지를 씹으며 물어오는 고대로의 입이 룸미러에 비쳤다.


"버업쩍?"


입 안에 가득한 과육을 우물거리며 내가 되물었다.


"우리는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족입니다, 라고 세상에 선언하는 거지. 입양 말이야."


가장 작은 알 중에서도 가장 작은 알이었을까. 도다리가 그새 말끔해진 입속을 훤히 보이며 덧붙였다.


입양…… 입양…… 입양……


목구멍까지 꽉 찬 오렌지 반쪽을 추스르며 나는 고대로와 도다리를 정신없이 번갈아 보았다. 가슴이 물결쳤다.


입양……?


밖으로는 꺼낼 수 없어 안으로만 굴려온 말이었다. 또르르르, 한줄기 과즙이 내 목젖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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