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면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어린 가슴에 별 다섯 개를 새겨버린 장면. 깎아지른 절벽처럼 가슴속이 새카매질 때면 쓴 약을 삼키듯 돌려 보고 돌려 보았던 명장면. 으슥한 정글에 버려진 인간 아기의 냄새를 맡고 송곳니를 번득이며 모여들던 야생의 무리. 무리에 둘러싸인 아기는 암전과 함께 화면에서 사라지고, 그곳에 남은 건 그리다 만 얼굴처럼 먹먹해지는 아기의 울음소리. 어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지는 정적, 정적, 정적. 정적.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가만히, 실눈을 떴다. 하나, 실낱같은 그곳을. 하나, 가로지르는 작은 새들의 날갯짓. 이어지는 창공, 구름, 잎사귀. 지저귐. 지저귐, 지저귐, 지저귐. 불러본 적 없는 이름처럼 메아리로 메아리로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지저귐. 노래. 그 아래서, 무리는 송곳니를 쓸던 새빨간 혀로 인간 아기를 핥고 있었다.
그런데 정글북, 어떻게 끝났더라……? 한 장면만 돌려 봤더니 결말이 애매한데…… 해피엔딩이었나? 그렇다면, 우리야 해피엔딩이라지만 모글리는? 모글리는 진짜 해피 했을까? 다 네 발이고 자기만 두 발인데? 털도, 자기만 턱없이 부족한데? 하긴, 무리의 대장이 모글리를 등에 태우고 끝없는 초원 위를 전속력으로 달릴 때 그들은 세상 부러울 게 없어 보이긴 했어…… 똑같이 태워준다더니, 나를 등에 태운 고대로는 몇 평 되지도 않는 보육원 잔디밭을 뱅글뱅글 돌다 아구구 아구구 자꾸만 멈춰 섰고 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스릴이라곤 없었지…… 어떻게 된 게 계속 쉬는 시간이었지…… 나 그냥 내릴래, 졸려. 결국엔 이 지경이었잖아……
그렇다. 육아 베테랑 무리에 둘러싸인 자아를 마주한 순간 내 의식에선 정글북의 첫 장면이 되살아났다. 마지막으로 돌려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수염이 난 뒤론 확실히 한 번도 안 봤다. 처음엔 경황이 없어서. 나중엔 그거 볼 경황은 없어서. 그렇게 내 의식은 나를 태우고 달려야 하는 고대로의 허리 컨디션쯤이 고민의 전부이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 푸르른 초원 위를 내달렸던 거다. 전속력으로. 그사이 자아의 분유를 타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던 현실 속 내 걸음은 흐지부지 멈춰버렸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젖병 대신 가드나 흔들며, 자아의 밥때를 거스르는 슬픈 결말을 내고 말았다. 일종의 방심이 부른 참사였다.
나는 서서히 가드를 내렸다. 가려져 있던 사수가 드러났다. 스르르 나를 올려다보는 사수. 푸르뎅뎅 거무죽죽 누리끼리 벌그죽죽 하여간 뭐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사수의 얼굴빛. 분명한 건 지금 사수의 전체적인 색감 역시 산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이로써 나는 재확인했다. 내가 사수 곁에서 조금 더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걸. 그게 우리가 함께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안전거리 확보. 흐으음…… 수염 단속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었다.
나는 대장 조리사 외 세 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베테랑들의 열띤 재롱에도 자아는 여전히 무반응, 꿋꿋이 울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육아계의 샛별 그러나 자아계의 베테랑, 내가 나설 때였다. 일단 안고 흔들면서 걸어볼 생각으로 나는 재빨리 자아를 안은 신부님 앞에 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 신부님이 선수를 쳤다. 내가 넘겨달라기도 전에 신부님은 거의 붙여버릴 기세로 내 품에 자아를 홀랑 안겨왔다. 꼬륵 꼬륵…… 익숙한 그 소리와 함께. 꼬륵 꼬륵…… 어떤 시련 앞에서도 거둬본 적 없다는 그 특유의 미소로. 꼬륵 꼬륵 꼬륵…… 신부님은 꽤 시장하신 모양이었다. 신부님의 내부 시계 역시 내 것처럼 정확했다. 꼬륵 꼬륵 꼬륵…… 밤 10시의 언저리, 아기의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은 밤잠 설치는 우리네의 야식 때이기도 했다. 꼬르르르륵…… 꼬르르르륵…… 이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내 소리다.
"오야오야."
내 품에 안기자마자 단추와 단추 사이부터 찾아낸 자아는 별도의 보충 절차 없이 바로 울음을 그쳤다. 주로 예수님에게로 쏟아지던 눈빛이 내게로 쏟아졌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한 우리네의 외부는 하나같이 홀쭉해져 있었다.
"배고픈 거예요."
생존의 첫 단계. 세 시간 간격의 식사.
"…… "
기본 중의 기본을 놓쳐버린 육아 베테랑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까마득한 육아계의 샛별에게 누구도 이러쿵저러쿵 말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럴 여력도 없어 보였다.
"자비야…… 여…… 여기……"
눈치 빠른 훈풍 수녀회의 막둥이, 비교적 정정한 사수가 어찌어찌 분유를 타 왔다. 안전거리 확보해야 되니까 가까이 오지 마시고 거, 거기 두세요. 내가 간절한 눈빛으로 말하자, 척하면 척인 사수가 상 위에 젖병을 내려놓으며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다들 어디 한 군데씩은 저릿저릿한지 나머지 육아 베테랑들이 저마다의 신체 부위를 두드리며 그 상에 둘러앉았다.
"저는 들어가서 아기 먼저 먹일게요. 밥 생각도 없고요."
꼬르르르륵…… 꼬, 꼬, 꼬르르르륵……
나는 상주 대기실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식구들이 물음표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음표들이 한목소리로 물었다. 밥 생각이 없다고? 소리가 그런데? 동시에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식구들의 입꼬리가 일제히 시무룩해졌다. 꼬륵 꼬륵…… 나는 신부님의 탄식이 특히 인상 깊었다.
"더는 안 됩니다. 굶는 건. 간단히 챙길게요."
끄응 몸을 일으킨 대장 조리사가 가마솥과 함께 챙겨 온 자신의 전용 쟁반을 쓸며 말했다. 손 큰 주인은 쟁반이라 우기지만 크기는 밥상과 다를 게 없는 그것은 우리네의 과식을 유발해온 주범이었다. '생명 존중'이 좌우명인 대장 조리사는 보육원 앞 베이비 박스에서 발견된 신생아는 물론 보육원 마당의 늙은 매화나무에게도 존댓말을 한다. 엊그제도 들었다. 봄이 가까웠습니다, 기운 내세요.
허기의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고 분명 배가 고팠지만 나는 뭘 먹고 싶진 않았다. 오랜 공복으로 소화 기능이 무뎌진 이때 소신껏 먹으면 탈이 난다는 걸, 다이어트한다고 반나절 굶곤 그날 밤에 허리띠 풀고 폭식하는 내 옆에서 사수는 내가 스스로 먹기를 멈출 때까지 일러주곤 했었다. 음식을 원하는 몸과 그런 몸을 거부하는 의식. 그러나, 결말은 내야 했다.
"흠…… 그럼 이거요."
나는 상주복 주머니에 젖병을 꽂고 떡 몇 알이 담긴 접시를 챙겨 들었다. 어떤 결말이든, 떡 몇 알이면 충분했다. 나로서도. 식구들로서도.
한 손으론 자아, 한 손으론 떡 접시를 받치고 뒤돌아 상주 대기실로 향했다. 뒤도는 순간 오렌지 주스가 늘어선 냉장고 유리 위로 둘러앉은 식구들의 얼굴이 스쳤다.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은 하나같이 입꼬리를 올리는 중이었다. 식구들과 나는 척하면 척. 그래, 시계가 멈추지 않아 다행이었다.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타임이 있어야 타이밍이 있으니까. 타이밍 없인, 타임도 없으니까.
작은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에 기대 자아에게 젖병을 물렸다. 분유를 삼키는 아기의 리드미컬한 목 넘김이 깜깜한 상주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아기의 작고 습한 손은 단추와 단추 사이를 떠날 줄 몰랐고,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집어 든 떡 한 알을 나는 오래 씹었다. 조금은 해피 하게. 떡 접시가 비어갔다. 해피 없인, 해피엔딩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