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찰 앞날을 기대하며 계획을 짜다 보면 고된 현실을 견디기가 좀 더 수월해서였는지, 계획 짜기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제일 좋아하는 취미이자 습관이 되었다.
단칸방에 여러 식구들이 조르륵 누워 좁게 잠을 청할 때마다, 한 평짜리 다락방에 밥상 펴고 공부하다 지칠 때마다, 나는 어른이 되면 돈을 벌어 뭘 할건지, 그걸 위해 얼마나 공부하고 참아낼지를 생각했다.
물론 어릴 때 궁리하던 환상적인 계획과 이삼십 대 내내 벌고 모은 현실의 간극은 크다. 그래도 꼼꼼하게 장단기 계획을 세우는 습관은 인생을 합리적으로 살아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마흔에 조기은퇴를 하고 캐나다 이민을 온 뒤에도 계속 계획을 짜며 산다.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에서 뒹구는 삼십 분 정도 이 계획들을 복기하고 수정하는 게 즐거운 모닝 루틴이다.
다만 은퇴 전과 다른 건 더 이상 일 계획, 수입 계획, 돈 모을 계획만 세우진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워커홀릭 시절 빡빡하고 온통 무채색이던 계획 대신, 이민 후엔 훨씬 다채롭고 느슨한 계획들을 짠다.
이제는 ‘어떻게 이 여름을 즐기지?’, ‘뭘 더 배워보면 좋을까?’, ‘내가 더 성찰할 면은 뭐고 어떻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계획하느라 즐겁다. 일과 돈에만 집착하던 마음을 버리니 내 마음, 내 신경을 여러 곳에 나눠 쓸 줄 알게 되었다.
이 다채롭고 느슨한 계획 덕에 내 삶은 더 활기차고 풍요로워졌다. 이젠 일분일초를 따지며 효율적일 필요도 없고, 남들 다 제치고 혼자 1등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마음 편히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를 찾는 데 집중한다.
행복하게 살기, 올바르게 살기 위해 즐겁게 내 에너지를 쓴다.
꿈같은 요즘의 일상은 이렇다.
이것저것 계획하느라 느지막이 일어나서 발코니에서 건강식 브런치를 만들어 먹는 아침, 생각이 많은 날은 명상도 하고 성찰 일기도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후엔 무료 영어공부 좀 하다가 요가나 미술, 운동 등 무료 취미반 수업을 들으러 다닌다. 이른 저녁엔 건강하게 요리해 먹고서 경제 공부, 주식 공부를 하다가 남자친구와 집앞 바닷가에 나가 무료 소셜 댄스를 춘다. 두세 시간씩 춤추고 오면 잠도 푹 자게 된다.
예전에 <댄싱 위드 더 스타>를 보며 언젠가 라틴댄스를 배우고 싶단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은퇴 뒤 열심히 그 꿈을 펼치는 중이다. 작년에는 아마추어 팀으로 캐나다 갈라쇼에도 나갔다. 나이 오십에는 멋진 춤 선생이 되어 영어 쓰며 수업해보고 싶다는 새 꿈도 생겼다.
시간 부자, 여유 부자가 되니 성격도 많이 둥글어졌다.
페르소나 가면을 쓰지 않아도 찐행복 찐여유에서 부처 미소가 절로 나온다. 속사포 같던 말투는 많이 느려졌고 축지법 같던 걸음은 슬렁슬렁 여유로워졌다.
다양한 이들이 각자의 속도로 사는 사회 덕에 나도 남들 눈치 보는 대신 내 속을 더 들여다보며 산다. 나만의 보폭, 나만의 속도로 내 길을 가고 있다.
이렇게 놀고 쉬고 여유부린다고 해서 경제관념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돈, 돈, 돈 거리던 집착은 없앴지만 경제력이 중요한 인생 기반이란 생각은 여전하다.
수입이 은퇴 직전의 1/10로 줄었지만 검소하게 사느라 불편은 없다. 은퇴 자금 대부분은 수익률 좋은 구분 상가 투자에 쓰고 월세를 받는 중이다. 소박한 상가 월세 수입을 쪼개 주식에 재투자도 하고 있다.
투자 공부도 전례 없이 열심히 하는 중이다. 은퇴자는 결국 소액이든 거액이든 자기 자산 잘 굴리는 투자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절약은 원래 익숙했지만 은퇴 후엔 즐거운 일이기까지 하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미니멀리스트로 살고 있다. 이젠 내 통장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건강을 위해서, 소비에 대한 내 자유의지를 위해서, 자연 환경을 위해서 덜 사고 덜 쓰고 덜 버린다. 이런 내 변화가 자랑스럽다.
깨달은 바가 하도 많아 <브런치스토리>에 소박한 파이어족의 경제 관념에 대한 글도 여럿 썼다.(brunchbook<소박한 파이어족 플렉스는 사양할게요>) 그 덕에 한국 방문 때 유튜브 경제 채널 인터뷰도 다녀왔다.(<싱글파이어>)
욕심 많던 은퇴 전에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못 했지만 욕심 버린 은퇴 후엔 나름 소박한 돈라밸(돈 and Life Balance^^)은 하며 지낸다.
예전엔 어땠던가?
서울에서는 한 손으론 샤워하고 한 손으로 양치하면서 머리로는 일 계획을 복기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바쁜 와중 밥은 5분 만에 먹느라 위염을 달고 살았다. 학원 가는 길에 걸음은 축지법 수준, 말은 속사포처럼 빨랐다. 밥을 먹든 서류를 옮기든 아무리 가벼운 일도, 뭘 먼저 시작하고 중간에 어떤 걸 하면서 마무리로 뭘 하면 제일 효율적일지를 계산해서 움직였다. 이런 나를 일터에선 추켜세웠다.
하지만 친절 미소 학원강사 페르소나를 벗고 나면 사실 속은 날카롭고 신경은 곤두선 채 살고 있었다. ‘망하면 어떡하지? 실수하면 어떡하지? 잘 안 되면 어떡하지?’, 불안증이 가시질 않았다.
그랬던 내가 지금 캐나다에 와서 이렇게 느슨하고 여유롭게 웃고 지낸다. 허 참, 사람 인생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뀔 수도 있구나.
무엇 덕이냐?
한창 수입 피크인 때에 다 버리고 한국을 뜬 내 결심도 대단했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지를 정한 내 안목도 칭찬해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좀 느슨하게 살아도 되게 하는 돈 많은 복지 선진국 캐나다, 순한맛의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캐나다에 그 공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