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춘추시대(B.C. 722-464)는 주 왕실(西周)의 멸망으로 인해 동천하여 유명무실해진 주 왕실을 대신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에 기초했던 패자(覇者)의 질서로 규정된다. 그것은 외형상 여전히 주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종법질서를 유지하지만, 내용상 전면적인 전환의 시기이기도 하다. 즉 주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분봉적 질서(feudal system)에서 다국적 질서(multi-state system)로, 장원경제(economy based on manorial management)에서 시장경제(market economy)로, 가(家)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부터 대규모 사회적 변동을 가져온 시기이며, 지성적·사상적 측면에서 봉건적 윤리관을 재해석한 공자(孔子)로 대표되는 지식인 집단의 출현을 통해 전통을 계승·수정하는 철학적 ‘돌파’(breakthrough)의 시기이기도 했다.
반면 춘추시대에 주의 종법 질서가 유명무실해졌지만 주 왕조에 대한 형식적인 복종과 가족적인 유대관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국가 간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전쟁의 잔혹성을 완화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명목상으로 주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질서이기에 ‘춘추’이며, 패자의 권위는 여전히 패자 자신이 갖춘 정치적 역량과 도덕적 규범성으로 인해 예제(禮制)와 규범적 구속력으로 작동했다. 춘추초기에는 약 170~200여 개의 국(國)이 난립했었다. 이러한 난립은 주 왕조의 쇠락을 상징하며 춘추시대 열국의 생존이 각자의 실력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더 이상 조정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적 권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어도 여전히 주 왕실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서 형식상 주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분봉적 질서가 유지된 한편 각 국가의 생존여부는 열국과의 관계를 통해서 결정되었다.
그렇다보니 이후 2,700년 간 역대 중국왕조의 역사서들은 춘추시대를 예제와 도덕이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이로 인해 주례라는 규범에 입각해서 열국의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평가의 근거 중 결정적인 것으로는 [맹자]에서 인용된 공자 평가를 거론할 수 있다. 맹자는 “성스런 왕들의 자취가 사라지자 시가 없어졌고, 시가 없어진 뒤에 춘추가 지어졌다. 진나라의 승과 초나라의 도올과 노나라의 춘추는 다 같은 성격의 책들이다. 춘추의 내용은 제환공, 진문공에 관한 일이고, 그 기록한 글은 사관의 문체이다. 공자는 그 속에 담겨있는 의리를 내가 외람되이 취했다고 말했다”고 지적하면서 “공자가 춘추를 짓자 인륜을 어긴 신하와 아들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공자의 [춘추] 저술로부터 유래한 ‘춘추’(春秋)시대는 공자 자신의 정치적 이상상에 부합하도록 편찬된 것일 수 있다. 즉 실재는 폭력이 문제해결의 기제였음에도 예제에 담겨 있다고 기대했던 도덕과 규범에 의해서 해결되었어야 한다는 믿음을 투영했던 것일 수 있다.
비록 공자와 맹자 모두가 그런 의도로 춘추시대를 실재와 완전히 다르게 포장했다 할지라도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춘추시대가 공자와 맹자의 믿음대로 도덕과 규범에 의한 우아하고 품위 있는 시대였건, 노골적인 폭력이 난무하고 패륜이 서슴없이 저질러지는 거친 시대였건, 춘추시대 자체의 존재와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 시대로의 진입을 위해 기존과 다른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지던 사상적, 정치적 역동의 시기였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