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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Aug 26. 2020

나에게 해줘야 할 행동, 타인에게 해줘야 할 행동

'나'밖에 모르는 사회에서 우리가 정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교육’이란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교’에는 본받음, 가르침, 알림, 훈계, 학문, 도덕, 종교 등의 의미가 있으며 ‘육’에는 낳음, 자람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바람직한 인격 형성을 통해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수단을 가르치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힘을 발산시켜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 <통찰과 역설> 中

 

건강한 사회


건강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부자가 빈자를 도와 모두가 안정적으로 먹고살 수 있는 사회? 열심히 일하지 않고 띵가띵가 놀아도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회? 혹은 개인의 삶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서 마침내 명예와 부를 얻어내는 사회? 자린고비 같은 기회를 보기 좋게 매달아놓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며 다그치는 사회?

확실한 건, 지금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선택한 사회의 여러 부정적 이면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냥 아침 출근시간에 짤막하게 듣는 5분 뉴스에서도 사회의 문제점들을 심심찮게 들어볼 수 있을 정도다. 


그 정도로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이 만든 ‘이상적인 사회’는 정말 불완전하다. 특히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집단이냐 개인이냐’하는 부분이다. 대한민국 경제성장이 우선과제였던 70-80년대에는 개인의 자유보단 개인의 희생으로 집단(조직)의 성장을 우선시하던 경향이 있었다. <가정보단 직장>이라는 모토를 세우던 사회적 풍토. 물론 이러한 방향성이 잡히게 된 이유에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합당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변했다. 다행히도 이를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조직이 1순위다’라고 외치던 시대와는 다르게 ‘사람이 먼저다’를 외친지도 꽤 됐다.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혼밥’, ‘혼술’, ‘혼영’ 등등 혼자 하는 활동들이 각광을 받기도 했으니, 증거로 삼을 건 충분하다.


근데 지금 이러한 ‘사람’ 패러다임이 과연 올바른 방향을 잡고 있는 걸까? 혹시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고 있지는 않은 걸까? 나는 조직이나 성과를 먼저 생각하던 사회나 개인의 자유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나 어느 하나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뭐든 ‘적당함’이 중요하듯, 사회적 패러다임에서도 이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적당함을 가늠하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 하고, 그다음 ‘타인’을 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자아와 타인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아는 아이는 타인도 귀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남을 존중한다.” - 천공


건강한 사회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사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혼자만 잘 살아서는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 활동이라고 하는 ‘의식주’를 해결해줄 수 있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바로 ‘직업’이다. 우린 직업이란 걸 통해 일을 하고, 그 일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는다. 그 보수로 ‘옷’도 사고 ‘밥’도 먹고 ‘집’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직업’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사람 대하기’다. 사람을 대하지 않는 직업이란 없다. 정치, 교육, 국방, 금융업, 요식업, 농업 등등 모든 ‘일’은 사람과 관련되기 마련이다. (일례로, 적당한 시간에 적당히 커피 마시며 대화하는 걸 상상해보라! 이를 '직장의 낙'이라고 부르진 않는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성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A부서에서 일을 하기 위해선 B부서의 업무자료가 필요한데 협조가 전혀 안 되는 상황. 올해 새로 기획한 금융상품이 나왔는데, 영업부에 해당 내용이 전혀 전달되지 않은 상황, 요리를 위한 식자재가 부족한데 거래처에서 상황이 안 된다며 요청을 거부하는 상황 등등 모든 직종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심하게는 ‘의식주’를 위협받게 될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물론 이 예들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극단적 상황을 표현한 것뿐이다.)


반대로 극단적인 ‘집단주의’가 성행할 때는 어땠는가? 뭐든 ‘조직’이 우선이었고, ‘가정’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직장에선 ‘야근’이 밥 먹듯 이뤄지고, 가정에선 ‘부부싸움’이 밥 먹듯 이뤄졌다. 그뿐인가? 일 이외의 자기 계발은 꿈도 못 꾸는 관계로 은퇴할 시기가 되거나 퇴직했을 때 앞길이 암담한 분들이 많다. 죽어라 조직을 위해 희생했는데 결국 남은 건 아무것도 없을 때, 느껴지는 좌절감이 여기까지 덮치는 것 같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 동일한 삶을 반복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앞으로 윤회할 삶이 조금은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뭐, 굳이 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미래를 위해서는 ‘직장’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나만의 활동(또는 업)’을 만들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자기 계발은 꼭 필요하다. (나만의 업에 대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스테르담 작가님의 <회사의 크기가 나의 크기는 아니다.> 글을 보시면 좋습니다. 마음대로 언급해서 죄송해요 작가님..!)

https://brunch.co.kr/@sterdam/1632

 

조직에선 어떤가? 업무를 함에 있어서 ‘협조’라는 게 꼭 필요하다. 협조할 줄 모르면 어느 하나 수월하게 이뤄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받을 수 있는 것도 다 ‘협조’의 일환이다. 어느 정도 ‘사람 대하기’에도 능통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적당한 자기 계발을 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서로를 존중할 줄 안다면? 각자의 이기심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적당히 양보할 줄 안다면? 앞서 봤던 문제들은 자연스레 해결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 적당함을 찾는 게 쉽진 않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하늘과 땅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의미다. 이 의미는 자칫 ‘자기만’ 중요하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만 더하면 오히려 더 긍정적인 의미로 바꿔낼 수 있다. ‘역지사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소중한 걸 안다면, 자신에게 위협되는 일은 타인에게도 안 하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준다.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스스로가 소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역지사지’, 이 두 가지를 같이 기억하자.


건강한 사회는 나를 알고, 타인을 대할 때 만들어진다.

 

정리해보자면, ‘조직이냐 개인이냐’하는 사회적 갈림길에서 우리는 ‘둘 다 적당히’ 가져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개인의 성장을 위한 자기 계발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고, 사람 간의 대화를 통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여기에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기억하면 좋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 그리고 상대방 또한 스스로가 가장 귀한 존재일 것이다. 내게 불합리한 일은 상대방에게도 불합리하다.] 한마디로, 나를 아는 것도 중요하고, 상대방을 생각하고 대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 하나부터..라는 생각을 갖고 이를 기억하고 상기한다면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추천 책 : [통찰과 역설] - 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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