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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Sep 02. 2020

남들이 자꾸만 미워지는 당신에게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 어떤 괴로움과 어려움을 당해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천공



사회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불합리한 경험을 겪으며 살아간다. 분명 학교에서는 “이게 착한 행동이야~”, “이렇게 올바르게 살아야지!”란 말을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들었음에도 말이다. 희한하게도 현실에서는 ‘이건 나쁜 거야!’, ‘이런 사람을 보면 혼내주세요~!’라고 부르던 상황이 더 일반적인 것처럼 느껴진다.(청개구리 심보 때문일까?) 


한 마디로 세상에는 ‘남의 등 처먹으려고 잔머리 굴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에게 붙잡힌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우린 붙잡힌 사람들을 보며 ‘그냥 관계를 끊으면 되지, 왜 저렇게 당하고만 살까?’라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막상 자신이 그런 일에 처하면 아무것도 못하고 당한다는 웃픈 현실이다. 그렇게 하나, 둘 불합리한 상황을 겪다 보면 마침내 사람 자체가 싫어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세상에는 언제나 반대편이 존재한다. 

 

나는 평소 흑백논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미워하게 된 당신에게 세상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서, 오늘만큼은 흑백논리를 빌릴 수밖에 없다. 단순히 말하자면 세상에는 언제나 반대편이 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는 것처럼. 옛 현인들은 이를 ‘진리’라고 가르치며 다니시기도 했다. 예를 들어볼까?


동양의 현인 중 한 명인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라는 성악설을 주장한 중국의 유학자인 '순자'가 존재했다. 이처럼 세상의 진리를 가르친다는 현인들 조차 정반대의 주장들로 갈린다. 진리에서조차 반대되는 생각들이 있다면, 세상에는 언제나 반대편이 있다는 말도 힘을 얻는다. 


위의 사례는 동양철학의 시선에서 ‘반대편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서양에는 이러한 증거가 없을까? 물론 있다. 이번에는 서양과학의 시선에서 증거를 찾아봤다. 


내가 헤집어 볼 과학 분야는 ‘양자역학’이다. 잠시 소개하자면, 양자역학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따른다는 이론이 있다.(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일은 A=B다 라고 확정시킬 수는 없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내가 ‘반대편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답은 양자역학의 연구 대상인 ‘입자’에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아주 작은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분자’라는 녀석은 ‘스핀’이라는 특성을 가진 ‘원자’들이 모여있는 형태를 띤다. 여기서 우리가 집중할 부분은 분자를 이루는 스핀들은 항상 서로 반대편 극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원자로 이뤄진 분자를 상상해보자. 이 분자 안에 있는 원자들은 각각 스핀-업/스핀-다운이라는 반대편 극들을 가진다. (더 얘기하면 머리만 복잡해지니 여기서 끝내겠다.)      

 

이처럼 동양철학에서나, 서양과학에서나 세상에는 항상 반대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들이 있다. 즉, 우리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와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쉬운 말로 풀어볼까? 만일 앞에 10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그중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 1명쯤은 꼭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품지 말자. 그랬다가는 그 사람이 내게 손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준다면 더 큰 생채기만 받을 뿐이다. 이는 당신에게 “참으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받아들여보세요”라는 일종의 ‘권유’다. 


혹자는 과연 효과가 있을지 반신반의하겠지만, 막상 ‘그래. 세상에는 나와 반대되는 사람들이 꼭 있어. 혹시 알아? 저 사람이 나와 반대되는 사람일지!’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동안 '사람들에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상처만 받는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동시에 그에 따른 스트레스들을 훨씬 덜어내는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은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고 말한다.

 

갑자기 사랑과 자비란 단어를 꺼내니까 어색할 수도 있겠다. 지금 이 단어들을 꺼낸 이유는, 두 단어에 담긴 속뜻을 상기한다면, 분명 스트레스와 건강 관리에 도움되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사랑과 자비를 좋아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4대 성인] 

불교의 부처님은 ‘자비’의 대명사로 꼽힌다. 이를 증명하듯이 불교에서는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대치시켜 사람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연민하는 것을 ‘도’로 여긴다. 한마음 선원의 대행스님께서도 사람, 동물, 벌레 등 구분 없이 누구든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 눈물을 흘리시며 ‘자비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4대 성인] 

기독교의 예수님은 ‘사랑’의 대명사로 꼽힌다. 실제로 성경책을 읽다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처럼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본인을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셨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래 두 글들을 보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쁘고 아름답고 싱그럽게 살아가기를 마음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 내 몸뚱이가 필요하다면 나는 서슴없이 내 몸을 바칠 것이며 그 일로 해서 내 몸이 다음 생에 벌레로 태어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대행 스님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 누가복음 24:46-47


눈치챘을 것 같은데, 이 두 구절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한마음 요전’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은 ‘성경책’에 있는 말씀들이다. 두 글을 보면, 꽤나 닮은 구석이 많다. 즉, 적어도 이 두 종교에서만큼은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과응보는 대자연이 만든다.


지금까지 1) 세상에는 항상 반대편이 존재한다는 것과 2)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 을 알아봤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은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이해하는 시각을 길러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역지사지’라는 단어도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이 내게 해가 되는 행동을 했다면, 분명 남모를 이유가 있다. 혹여나 ‘질투’, ‘경쟁심’, ‘승부욕’, ‘욕심’ 등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에 속으로 상처 받고 있을 수도 있다. 정말 불합리한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겠지만, 딱 한 번만 그 사람의 시각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자격지심’에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지독한 ‘외로움’에 관심받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거라면? 정말 드물긴 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좋아해서’ 그러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우린 지금 그런 사람들의 무의미한 행동들에 일희일비해서 기분이 상하고, 스트레스받고, 건강이 악화되는 것이다. 

차라리 반대편의 사람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상대를 바라보자. 상대의 행동을 ‘미움’으로 보지 말고, ‘부러움’이라고 생각해보자. 적어도 우리를 괴롭히는 스트레스로부터 한 걸음 정도는 멀어질 수 있다고 확언한다. 


**참고 문헌 :

1. [퀀텀 스토리] - 짐 배것(양자역학)

2. [한마음 요전] - 대행 스님 법어집(부처님의 가르침)

3. [성경] - 선지자들의 말씀집(예수님의 가르침)

4. [통찰과 역설] - 천공(대자연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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