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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Aug 23. 2024

일만칠천 육백 오십 일일입니다.

나는 꿈을 꾸듯 내게 찾아왔던 수많은 기억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그렇게 많은 낮, 그렇게 많은 저녁, 그렇게 많은 시간들, 그렇게 많은 밤. 그 모든 것들은 내 인생에 10분의 1도 채우지 못한다. 다른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수천의 낮, 수천의 저녁 수백만의 순간들은 내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다시 기억으로 돌아오지 않은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두 다 가 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로. <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


휴대폰 계산기를 실행시켜 내가 태어난 후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계산해 봤다. 윤달까지 있으니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다. 그래서 카카오톡 프로필 편집화면으로 들어가 디데이 설정을 해봤다. 태어난 후 오늘이 17,651일에 해당되는 날이다. 일만칠천 육백 오십일. 숫자를 읽어보니 너무 길고 많다.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온 거였어? 그러나 나 역시 헤세의 말처럼 내 인생의 10분의 1조차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 수천의 낮과 밤이 잊혔다. 그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남아 있는 나날들도 다르지 않겠지.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먼 훗날엔 사라져 버린 수 천 시간 중 하나가 될 게 분명해 보인다.


쓸쓸한 마음에 울었던 날, 친구의 배신과 비난을 들어야 했던 날, 서늘한 눈초리를 받고 어색한 하루를 보내야 했던 일터, 어려운 일 앞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두려웠던 날,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침내 가야 할 곳을 찾아냈던 날, 너무 많이 웃어서 눈물이 났던 날. 밤새워 공부하고 스스로가 뿌듯했던 날,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들어 어리둥절했던 날. 그리고 또 그렇고 그랬던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심심했던 날들까지 떠올리면 대단히도 길고 오래된 역사인데. 기억에 남겨진 날보다는 사라진 날들이 훨씬 많다. 1988년 5월 2일이라는 특정한 날의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나는 게 없다. 그렇구나. 그렇게 많은 것들을 떨구며 사는구나. 당시엔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로 갑갑했던 일들이 지금은 사라져서 흔적조차 없다. 먹은 음식을 소변과 대변으로 흘러 보내듯이 일상의 이야기들 역시 어디로든 흘러 보내고 있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시간들.


일상은 결국 거의 다 잊히고 사라진다. 지금 내가 버텨내야 할 일들 역시도 그리 될 테다. 즐거움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시간들도 어김없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겠지. 아픔도 아름다워 소중한 것들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을 진실로 알고 있는 사람이 된다면, 시련 앞에서도  담담해질 수 있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시간의 소중함도 잘 보이겠지. 그러나 이런 지혜를 알아차리려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일만 시간으론 어림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이만 삼만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 되기도 한다.

 살아가야 할 시간이 줄어들고 삶이 계속될수록 유일하게 진실이라 여겨지는 한 가지는 ' 모든 날들이 감사다'라는 거다.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 중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절로 살아온 것 같지만 나를 지켜주는 어떤 힘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음을 느낀다. 사라져 버린 시간들이 이런 깨달음으로 되돌아오는 건 아닐까? 사라진 시간들 덕에 기억하고 품어야 할 일들을 오래도록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삶과 죽음처럼 기억과 잊힘도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반쪽짜리 언어들이다.


 매일 밤 글을 쓰며 하루를 마감하는 이 시간들은 언제나 즐거운 추억으로 되살아나 나를 웃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쓰기의 말들이 저절로 나오지 않으니,  문장을 쓰기 위한 고통의 날이 더 많지만 지나간 후엔 그 시간조차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억의 한 토막이(헤세의 표현을 가져와 본다) 되어 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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