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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Aug 30. 2024

팔십에 보내는 허송세월

나보다 훨씬 좋은  삶을 살고 있는 타인들을 종종 부러워한다, 마흔 다섯 이후론 나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긴 세월을 살아내고 공원 벤치에 앉아 햇빛을 쬐거나 우두커니 허공을 바라보며 대과거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그들의 표정 같은 것들이 부러워지는 거다. 잘 살았던 못 살았던 감옥 같은 데 드나들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 냈다는 것이 대단한 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먼저 살아 본 사람들의 경험과 다 써버린 그들의 시간이 부러워지는 거다. 얼마 전에 <허송세월>로 만난 작가 김훈 선생님의 삶도 그와 비슷했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오후 두어 시간 정도 햇볕을 쪼이며 세월을 보내는 작가님의 삶을 들여다보며 부러움을 품는다. 허송세월로 바쁘고 싶은 마음. 두어 시간 햇볕을 쬐어도 시간이 남아도는 인생이라니 근사해 보였다. 누구보다 그런 일을 잘 해낼 자신도 있었다. 무척 바쁘게 허송세월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문장을 자꾸만 읽었다. 그렇게 바라본 '허송세월'은 얼마 전까지 한심해 보였던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이 먼 거리에 놓인 신기루 같았다. 과연 나도 '허송세월'에 이를 수 있을까? 지금 생각으론 폐지를 주워 모아 생활비를 마련할 정도로 가난한 삶이 아니라면, 얼마간의 자금만으로도 충분히 허송세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가 되면 나도 작가님처럼 허송세월로 바쁘고 말 테다.


지난 목요일은 모처럼 혼자 시간을 보냈다. 허송세월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생각과 몸이 계속 배신했다.  아침 일찍 카페로 가 세 시간 정도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집에 와서는 곧바로 청소기를 들고 집안 곳곳의 먼지를 제거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머리를 쉬게 해 줄 유튜브 시청으로 시간을 허비했고, 이후로는 운동을 가고 씻고 저녁을 준비하고 둘째를 가르치고 또 큰애를 데릴러가는 일련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에게 다가왔으니, 허송세월은 요원한 일이었다.  시간이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80년 정도 시간을 쓰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구나 한다. 마음먹는다고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해서,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어렵다. 하루 한두 시간 누리를 호사가 아니라 인생을 완전히 허송세월에 맡길 수 있으려면 팔십 년이란 시간을 잘 살아내야 하는 거다. 몸이 심하게 아프거나 거동이 지나치게 불편해도 그런 시간은 허락되지 않겠지.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을 온전히 살아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게 허송세월은 아닐까? 누구나 다 누릴 수 없고, 누구에게도 거저 주어지지 않는 게 허송세월이라 생각해 보니, 그 세월을 보내기 위해 지금 주어진 시간을 잘 써야겠단 생각이 앞선다. 해서 마침내 팔십의 시간이 왔을 때 진짜 나만의 허송세월을 보내고 싶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해가 세상을 온전히 비출 때까지 기다리거나, 바람 부는 정원에 앉아 나뭇잎과 작은 풀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두어 시간 바라보거나, 느리게 읽히는 책을 느리게 읽고 또박또박 바른 글씨로 옮겨 적는 느린 필사를 해 보거나, 되지도 않는 그림을 그려본다고 스케치북에 커피잔이나 꽃잎 같은 것을 쓱쓱 거리며 긴 시간을 허비하는 허송세월. 내가 꿈꾸는 팔십의 허송세월은 이런 거다. 부디 그런 시간이 허락되길 소망하고 또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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