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말을 들어 보자.
" 평생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도 절대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가장 순진한 영혼을 지닌 어린아이 같은 사람일 것이다."<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
둘째는 첫째보다 컸다. 뱃속에서 꿈틀 거리는 그 애의 움직임과 발차기가 너무 격렬해서 불룩 튀어나온 배를 두 손으로 움켜 잡고 아이가 진정하길 기다리곤 했었다. 아이가 맨 처음 내 뱃속에 자리를 잡았던 날부터 몇 주간 불면증이 찾아왔다. 특별히 불안하거나 걱정할 일이 많진 않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자려고 눈을 붙이고 침대에 누우면 온갖 상념들이 머리를 뒤덮고 무거운 눈꺼풀은 자꾸만 위로 올라왔다. 힘을 주어 꼭 감은 두 눈이 사정없이 다시 떠지고 정신이 깨어있길 원하는 기나긴 밤이 이틀 이상 계속되자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왜 잠들지 못하는 걸까? 오늘 밤엔 잘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답 없는 질문을 뒤로하고 약국을 찾아가 수면제를 사 왔다. 평생 처음으로 먹어보는 수면제였다. 그렇게라도 자지 않으면 병에 걸릴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거다. 수면제 두 알을 먹고 침대에 누우니 몽롱해졌다. 이틀간이나 못 잤으니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오늘 밤도 못 자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한두 시간 잠이 들었을까? 나의 눈꺼풀은 망설임 없이 어두운 밤을 뚫고 열렸다. 몽롱했던 머릿속은 금방 아침을 맞이한 것처럼 선명해졌고, 다시 잠들지 못하는 시간을 이불속에서 힘들게 버텨내야 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을 얼마나 많이 찾았는지 모르겠다.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자그마한 거실을 오가고, 멀리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과 가로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자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내고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음소거된 티브이를 시청하기도 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하루가 시작되어도 잠은 찾자오지 않았다. 불면증을 몰랐던 나는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를 알아버렸고, 이후 누가 그런 밤을 보냈다고 하면, 내 일처럼 생각하곤 했다.
나의 불면증은 서서히 사라졌고, 둘째를 임신했단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모르고 먹었던 수면제가 걱정되었는데 의사는 아이에게 영향이 갈 시기가 아니라서 괜찮다고 했다. 태어난 이후로 아이는 꽤 오랜 시간 밤과 낮이 바뀌어 나를 힘들게 했다, 육아와 살림에 속수무책이었던 시절, 무슨 일이 있어도 밤이면 잠이 찾아왔고, 일상은 빠르고 혼란스럽게 흘러갔다. 잊혔던 시간이 헤세의 문장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평생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나는 격하게 공감하면서 14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잠 못 이뤘던 밤이 갑자기 근사해지고 헤세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뿌듯함이 마음을 채운다. 물론 헤세가 말하는 밤은 삶의 고통으로 끊임없이 어어지는 상념과 불안, 어찌할 수 없는 불행한 일 앞에서 좌절한 사람이 맞이하는 밤일 테다. 그러나 그 시절 나는 의식 없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으리라. 남편은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또 한 번 어린아이를 시댁에 맡겨야 하는 일과 차갑고 갑갑했던 회색 세상으로 몇 주간 돌아가 있어야 한다는 불편한 마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을 테니까. 마지막 수술이 있기 전 집에서 보냈던 한 두 달 그는 목발에 의지했고, 그런 아빠의 낯선 모습에 어리둥절했을 큰애의 어색함.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려 애썼던 나의 일상들은 사고 이후 찾아온 단란한 가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애씀이 간절하고 크면 내 안에 곪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그 불면의 밤은 분명 헤세의 밤이었을리라.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에 잠 못 이루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 불면의 밤들이 아름다운 삶의 한 페이지임을 알게 될 날이 올 거라 말해주고 싶다. 깜깜한 밤하늘을 비추는 별들도 늦은 밤까지 잠들지 않고 우리를 비춘다. 어떤 이에겐 경이로움을,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별들의 이야기을 쓰게 한다. 나의 밤들이 오늘의 글이 되어주었듯이 잠들지 못했던 당신의 시간은 먼 훗날, 시가 되고 소설이 될 테다. 당신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