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만 나이로 통일되면서 2살이 어려졌습니다. 친구들은 마흔, 저는 아직까지 서른아홉이지요. 문득 부쩍 큰 아이의 모습을 보니 뿌듯하고 고생하며 키운 보람도 느껴지고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점점 엄마 품을 떠나 자신의 길을 뛰어가기 시작할 텐데 '엄마'인 나는 그저 가만히 아이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결혼하고 임신과 출산, 그리고 독박육아를 하며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가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닌 지 3년 차가 되니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 남편 하나만 보고 들어온 '영흥도'에서 일도 하고 친구도 사귀며 지낼 줄 알았는데 바로 육아에 투입되다 보니 '경력단절'을 원치 않게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말이 늦고 때마침 '코로나'도 터지고 이런저런 일들이 끊임없이 터지니 정신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죠. 그런데 인구와 아이들이 제법 있었던 동네가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한 곳의 어린이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곳에 있던 아이들이 우리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들어오면서 바글바글했는데 7살 형아들이 졸업을 하고 나니 어린이집의 원아가 반으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갑자기 문을 닫게 되면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민도 되고 걱정도 되었죠.
저출생으로 인한 문제점이 현실이 되어 바로 내 앞까지 성큼 다가온 것입니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들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같이 어린이집을 다니던 친구들도 여럿 이사를 가 적은 인원수가 더 적어졌습니다. 어디를 가도 갓난쟁이는 찾아볼 수 없고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곳은 어르신이 많은 지역이라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흔한 놀이터하나 없었거든요. 무엇보다 대중교통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한 시간에 한 대만 운영하는 버스가 있을 뿐 차가 없다면 찬거리를 사러 나갈 수 조차 없는 외진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같이 어울려 놀 만한 곳도 없고 서로의 집을 오가기도 쉽지 않았죠.
창살 없는 감옥이 이곳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차가 없으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곳에 있다 보니 병원 가는 것도 마트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아 신랑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임신을 했을 땐 지원도 많고 출산비용과 육아용품도 지자체에서 선물로 주기도 해서 나름 만족도 하고, 산후도우미 같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어 금전적으로 도움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금전적인 도움이 좋았고 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병원비용과 산후조리원 그리고 아이용품 구매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아 돈도 저축도 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죠. 아이는 돈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코로나'를 겪으며 폐쇄적인 환경이 더욱 외부와 단절되어 사람과 마주치지도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2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아이가 하나다 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다 보니 양가 부모님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일이 있을 때만 가게 되고 친구와도 만나지 못하는 나날이 길어졌습니다. 그 여파인지 아이의 말문이 터지지 않았죠. 지금은 쉴 새 없이 말을 해서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힘들지만, 그때는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녔습니다. 아이건강검진에도 언어부족에서 언어 지연으로 점차 걱정이 될 정도였어요.
의사 선생님도 '코로나'의 부작용으로 우리 아이처럼 말문이 늦어지는 친구들이 늘었다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아서도 안된다며 센터에 가서 검사를 받고 언어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우리 아이는 제 앞에선 소통도 되고 지시수행도 잘 되고 표현도 잘 되는데 다른 사람과는 소통을 어려워해 걱정 아닌 걱정을 많이 받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건 아이가 말문이 늦고 낯가림이 심할 뿐인데 그 모든 것이 '엄마'가 제대로 육아를 못해서, 제때 언어노출을 못해서... 다양한 말로 '엄마'인 저를 괴롭히고 제 탓을 했습니다. 그때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러다 말문이 틔고 낯가림이 누그러지며 활발해지니 전혀 다른 아이가 되었어요.
혼자 살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또 서울에서만 살다가 영흥도에 와서 지내보니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혼자가 둘이 되고 셋이 되는 가족을 이루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행복을 느끼고 그래도 세상에서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나 자신에 대해 진솔하고 꾸밈없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