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는 빨리 정할수록 좋대요
1학년 때 다양한 경험을 해봐. 그러다 보면 네가 하고 싶은 진로가 자연스레 정해질 거야. 2학년부터는 그 진로에 맞춰 스펙을 쌓아야 해.
이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이과처럼 직업의 범위가 확실하지 않은 전공이다 보니 이런 조언은 더 강하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주변에는 1학년 때부터 CPA 자격증을 준비하는 친구가 많았다. 이미 회계사라는 진로를 정했다면, 졸업 후 곧바로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회계사는 첫 번째로 탈락한 진로였다. 내가 유일하게 받은 C+이 바로 ‘회계의 이해’였기 때문이다. 마치 직업을 두고 ‘프로듀스 101’을 하듯, 매일 진로를 탐색하며 나와 맞는지 고민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매주 순위 하나에 생사가 갈리는 연습생들처럼, 나 역시 취업 연습생으로서 탈락할까 봐 밤낮으로 불안에 시달렸다. 취업 전까지의 나는 “준비생”에 불과한 듯, 아직 내 인생은 시작하지 않았다는 듯.
이제야 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데, 스무 살 때 진로를 정해야 한다는 말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터무니없는 소리다. 특히 그 조언에는 늘 빠지지 않는 두 단어가 있었다. 바로 “전문성”과 “경쟁력”. 경영학이라는 모호한 전공을 가진 학생으로서, 이 두 단어는 내가 집착하기에 딱 좋은 개념이었다. 학교에서 기술을 배우지 않으니, 밖에서 나만의 경쟁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학교 안팎을 쉼 없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나만의 경쟁력”이란 단순한 대외활동으로는 결코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유튜버든 창업이든, 가시적인 성과를 내어 상위 1%에 들어야만 진정한 경쟁력을 얻을 수 있는 법. 당시 나는 남들이 놀 때 더 열심히 노력하면 전문성과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요령 없이 힘만 쏟아부은 날들이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것이 갓 성인이 된 나의 한계였던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이 에세이의 말미에 그 시절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담으려 했다. 하지만 조언에 휘둘려 괴로워했던 시절을 되돌아보곤, 이 아이디어를 그때의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으로 바꾸었다. 각자의 상황과 입장이 다르고, 작은 말도 시작의 단계에서 불안해하는 누군가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6년 전의 내 경험이 지금에는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1학년 때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진로의 틀을 잡고, 2학년부터 스펙을 차근히 쌓아야 한다”는 말이 취업의 관문을 통과하는 마법의 열쇠로 들렸다. 하지만 만약 그때 내가 개발자를 미래 직업으로 정했다면, 나와 개발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꽤나 답답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설령 억지로 개발자의 길을 시작했더라도, 나보다 재능 있는 사람들과 챗GPT 같은 첨단 기술에 밀려 원하는 기업은커녕, 그 문턱에도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과장된 생각일 수도 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개발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고, 적어도 나보다는 챗GPT가 더 나은 코드를 짠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옳은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가보고 싶은 길이 있을 뿐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벌써부터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아. 결국 내가 잘하는, 혹은 잘할 것 같은, 특히 너무나 해보고 싶은 길을 무턱대고 가다 보면 진로의 가닥이 잡힐 거야. 사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멋진 직업인도 그렇게 직업을 시작했거든. 세상은 출구가 정해져 있는 미로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