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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T맘 Sep 12. 2024

그래도 잘했다고 해 줘

초등엄마의 법무사 도전기

 

 약 4년 만에 브런치에 글을 쓴다. 나 혼자만의 컴백, 혼자 설레는 중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떠났던 연인에게 돌아온 기분도 들고, 묘하다. 왜 이제 왔냐고 욕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떠나버리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있어준 브런치라서 감사하다. 어쩌다 한 번씩 블로그에 짧은 후기나 일기는 잠자기 직전 휴대폰으로 대충 훅 썼지만 이렇게 커피를 내려 마시며 노트북을 켜고 정성스럽게 장문의 글을 쓰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타닥타닥 타자 치는 이 소리가 너무 경쾌하고 이제 9월이 되니 제법 선선한 바람도 간간이 불어온다. 마음껏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 깨닫는 지금. 학교 공사로 길었던 초1 첫 방학도 끝났고, 엊그제 아이 책가방과 실내화 가방을 손빨래하면서 새삼 엄마 다운 느낌에 젖어보기도 했다. 이제 좀 더 아이를 잘 챙기고 여유감을 가지고 재정비를 하겠노라 다짐해 본다.



 8월말 토요일, 제30회 법무사 시험에 첫 응시했다.(너무 갑자기 훅 들어갔나ㅋ) 4년간 가장 좋아하고 나름 잘하는 글쓰기를 끊어내며, 공부한다고 육아와 살림이라는 당연한 일이 스트레스가 되어버리며 악에 받쳐 지내온 결과물은 너무나 참혹해서 아쉬울 것도 없다. 사실 어제 엄청 길게 썼던 글이 다 날아가서 다시 쓰는 건데도 예전처럼 화딱지 나지 않는다. 다시 쓰면 되지 뭐.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나는 큰 경험을 했기에 글 날아간 거 따위는 그저 그러려니 하게 된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먹고 자란다.


둘 다 놓치지 않고 싶었지만.... 빨래만 잘 됨

 

 법무사 1차 시험은 총 8개의 법과목을 치르는데 과목마다 비중이 달라서 전략도 중요하다. 비중이 적은 세 과목은 거의 진도를 못 나가고 응시한 터라 애초에 합격이 아니라 나머지 비중이 큰 과목들에 대한 모의고사이긴 했지만, 길고 긴 지문과 판례를 50초 안에 확답하고 넘어가야 하는 시간싸움에서 대실패 하며 공부한 과목들조차 너무 많은 문제를 읽어보지도 못하고 찍어냈다.



 오전 9시 30분부터 시작한 시험은 오전 11시 즈음부터 확신의 실패였지만, 오후 4시 시험이 끝날 때까지 꾸역꾸역 그 자리를 지키고 나왔다. 아데노 감기로 컨디션이 안 좋아 기침으로 뒤척이며 잠도 잘 못 잤지만 인천에서부터 바리바리 짐 싸서 지하철로 서울 대방동 언덕길 위에 있는 시험장까지 겨우 도착해 끝까지 해본 것에 대해 스스로를 칭찬하려고 한다. 칭찬할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망해도 도망은 가지말자. 더 없어보이니까
집이 가까웠으면 도망갔을지도..

 

 시험 전날 밤만 해도 아쉽게 떨어질까 걱정하며(제일 어이없는 부분ㅋㅋ) 한 글자라도 더 본다고 늦게 잤고, 7시 반에 나왔어야 여유 있는데 8시 다 되어 나와 지하철 타고 신대방삼거리역에 하차한 시간이 오전 9시 5분… 시험은 9시 반 시작이고 원칙은 9시까지 입실이라 진땀이 비질비질 났다. 역에서부터 도보 10분~15분 또는 마을버스로 네 정거장이었는데 마을버스가 보이긴 하지만 바로 출발하는 느낌이 아니어서 언덕길을 뛰듯이 걸었다.



 시험장 정문에 도착하니 9시 16분. 시험 수행원들이 나를 보고는,

 “어서 들어가세요. 22분부터 시험지 배부하는데 그러면 못 들어가세요!”
 하필 내가 갈 시험장소(교실)는 유난히 큰 그 학교의 저 구석 후관의 가장 위층 복도 맨 끝. 위치가 에지 그 자체다. 수험생 주제에 감히, 각자 시험장소로 흩어지려 줄 서서 걸어가는 감독관들의 행렬 사이에 껴서 교실을 찾아갔다. 



 교실에 들어선 시간은 9시 20분. 모두의 시선이 낯 뜨겁게 느껴졌다. 감독관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이제 오신 거예요?”
 그렇게 이미 수틀린 인간임을 인증한 채, 휴대폰을 급히 끄려는데 이 빌어먹을 휴대폰이 죽어도 안 꺼지고 자꾸만 물방울 모양 빅스비가 켜지는 거다. 점점 땀이 흥건해지다 안 되겠어서 ‘그냥 무음모드로 할게요’하며 빌면서, 여러모로 창피한데 창피할 시간도 없이 바로 시험 시작종이 울렸다. 아마도 그 교실 수험생들은 나를 보며 ‘그래도 내가 쟤보다는 낫다'라는 생각을 했거나 안 그래도 예민한데 정신 사납게 군다며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합격 마지노선에서의 에지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에지는 입실 불가 마지노선에서 펼쳐졌다.


그래도 웃자..울면 우스워지니까
나도 남 일이면 재밌을텐데..


  11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 꽤 긴 점심시간. 밥 먹을 자격도 없는 것 같아서 학교 앞 편의점에서 요구르트 음료를 산 후 시험장으로 돌아와 목표물 없이 아무 곳에 시선을 꽂은 채 주 욱 주 욱 빨아들였다. 시험장과 그 주변으로 다양한 수험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여유가 넘치는 사람도 있고, 복도나 운동장 한쪽을 왔다 갔다 하며 복기하는 절박한 듯한 사람, 같은 학원에서 온 건지 무리를 지어 있는 사람들까지. 그중에 나는 이미 망했고 여유도 없으며 절박하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그저 휴대폰을 켜서 전날 저녁부터 서울 엄마네에서 하루 묵고 있는 딸에게 전화 한 통화하고 남편에게는 톡으로 대폭 망한 썰을 풀었다. 뭘 제대로 먹지도 않았고 다음 교시 대비할 필요도 없어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긴 점심시간이, 반성을 길게 한 건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4과목은 오전에 지나갔고 점심시간 후 4과목은 아주 조금은 나아진 수준으로, 하지만 아무리 신경 써봐도 또 시간배분에 실패하며 막판에는 하릴없이 접신한 듯 찍어내고 오후 4시가 되어 시험이 끝났다.



 웬만한 책 두께인 시험지 뭉치까지 더해지고, 패배감도 더해져서 집 가는 길은 혼자 가고 싶지 않아 졌다. 어제만 해도 남편에게 각자 출발해서 엄마 집에서 만나 아이 데리고 오자며 발랄하게 굴었으나 점심시간 때 이따가 끝날 때 제발 나 좀 데리러 오라고 했다. 망한 썰은 점심시간에 다 해서 더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웃음만 나왔다. 자꾸 본인이 F라고 우기는 남편은 차 타자 마자부터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 내내,



 “거 봐, 기본서 그만보고 문제를 엄청 풀어봐야 한다고 했잖아~집에 문제집도 기출 말고는 없어 보이더구먼. 내년에 또 볼 거면 문제 엄청 더 풀어야 돼.”

 “요즘 법률서비스앱 나온 거 알아? 점차 고도화되고 확장되면, 붙는다 해도 몇 년 일 못하고 사무실 닫아야 할걸?”

 “솔직히 너 사무실에 처박혀서 서류 쓰고 법원, 등기소 왔다 갔다 하는 거 안 어울려. 책 읽고 글 쓰고 영상 올리고 기회가 오면 강의 다니고 그게 훨씬 어울리지. 요즘 누가 스피치 학원 돈 들이고 강사 되니? 개인 브랜드 세상이다.”
 “잘 생각해 봐. 가망 없는 시험을 또 준비할지, 가능성이 바로 확인되는 작업을 즐기면서 해볼지. 고민 오래 하지 마. 너도 마흔이다.”


재수 없지만 설득되네?


.... 이렇게 극 T인 나조차도 흠씬 얻어터지는 멘트를 날렸다. 제 짝은 따로 있다더니만 희한하게도 그런 말들을 들으니까 온종일 무겁게 짓눌리던 두통이 마시지 되듯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 어떡해 자기야ㅜㅜ 그동안 애 키우며 하느라 애썼는데 ㅠㅠ 너무 속상해하지 마. 다시 잘 준비하면 되지.’ 이런 식이었으면 괜히 고군분투했던 모습만 되뇌며 억울하고 슬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순식간에 객관화 모드로 전환하면서 딸이랑  근처 이모네로 가 있는 엄마를 만나, 오랜만에 만난 이모네와 다 같이 오손도손 망한 시험 후기를 나누다 인천 집에는 밤 11시 넘어 도착했다. 시끄럽게 다 같이 있을 때는 전혀 울적하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고요함을 느끼니 어쩔 수 없이 울적해졌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도전은 해야 할까? 다른 길을 찾아야 할까? 일단 자자.


잊자는 건 알겠고, 시발은 시발이다 ㅋㅋ


 사촌동생이 ‘누나 환경 자체가 와꾸가 안 나오는데 사실 힘든 거지.’라고 말하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4년 전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면서부터 붙잡고 있던 거지만 계산을 해보면 집안일, 육아하고 쥐어짜서 공부해 봐야 4~5시간 겨우 했고 이 분야에 전혀 경험과 지식이 없기에 초반에는 학을 떼고 몇 달은 관두기도 했다. 미련이 남아 다시 도전했지만 주말은 가족 나들이다, 밀린 집안일 한다 하며 더 못했고 가족 행사, 여행, 명절 등 아예 구멍 나는 기간도 많았다. 공부를 한다 해도 계속해서 ‘엄마, 이거 봐바, 나 좀 봐바, 같이 놀자, 이거 해줘.’하는 아이로 인해 집중이 힘들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아이가 잠들면 새벽까지 공부하며 열심히 애썼다. 가족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주말이나 평일 밤 시간은 도서관에서 내내 박혀 있어 볼까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피해 주며 도전하기엔 이미 확률적으로 자신 없다고 판단해서 고사했다.




 법무사 자격 및 취득 후 업무의 특성상, 법학 전공자나 관련직 경험자들이 응시하는 경우가 많고 나이대도 지긋한 편이라 본업이 따로 있고 짬 내서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첫 응시에 2차 서술형까지 동차 최종 합격하기는 쉽지 않다. 더 핵심은 응시자 규모는 수천 명인데 상대평가로 120여 명을 선발한다는 것. 2015년도를 기점으로 꾸준히 경쟁률이 높아지더니 이번 연도 제30회 법무사 시험은 응시자 8,255명 중 선발예정인원은 130명으로 63.5 : 1의 경쟁률(역대 5위)을 기록했다. 개인 합격률이 2~3%인 시험인 거다.


https://m.blog.naver.com/edupass77/223556867287


안 궁금하신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남편 : 늘, 너만 화 안 내면 돼.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왜 그래 ㅜ

 

 여기까지 쓰다 보니 내가 무식해서 실패한 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반대해석을 해보자면 다들 와꾸가 안 나오는데도 붙는 사람은 있고, 때로는 본인 ‘리걸 마인드’로 그냥 응시했는데 합격했다는 믿기 싫은 존재들도 있다. 어쨌든 안일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고 공부한 과목들이라도 내 실력 껏 시간 안에 다 풀어냈어야 했다. 붙잡고 흘러간 세월과 머리에 집어넣은 얕은 지식이 아깝긴 하니 속독속해와 더 정교한 내용 정리에 집중하여 내년에 재응시는 해보려고 한다. 대신 이제는 실사판을 경험했으니 악에 받치고 스트레스 받아가며 공부하지는 않으련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다시 쓰기로 했다. 남편을 비롯한 지인들 대부분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건 글 쓰고 말하는 거라고들 하니까. 일상 및 경험에 대한 영상과 기록을 남기며 콘텐츠를 쌓아 다른 좋은 기회가 닿도록 해보려고 한다. 직장인의 대표적인 허언인, 유투버 하겠다는 거냐며 비웃어도 상관없다. 개인 브랜드 세상인 건 확실하고, 다 떠나서 다시 글 쓰니까 오래간만에 정말 재밌다 !


바람맞으며 가보자 가고 싶은대로


 세상 살기 편해진 건 맞는데 그만큼 사람이 필요 없어져서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다 가진 놈이 이기는 것 같다가도 별거 없는 것 같은데 뭐 하나가 빵 터져서 대박 나기도 하고, 고전적인 방식 외에도 다양한 방식이 통해서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있다지만 창의성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불안을 만드는 구조이기도 하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길래 그렇게 살아왔더니 갑자기 (옷도 잘 입)어야 되고 (말도 재밌게) 잘해야 된단다. 방금 이 문장은 괄호 안 상황을 다른 걸로 바꿔껴도 다 통한다. 그래서 불안감에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거나 증명해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 역시 출산 및 육아로 인한 흔한 경력단절여성으로서 다시 복직을 할 것인가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에서 후자를 선택하며 고독한 증명의 길로 들어섰다. 소싯적 공부를 잘한 편이었으나 한창 집중할 고등학교 시절 집안 사정으로 공부를 제대로 못한 한(恨)이 있는데 관심 있던 분야로서 법무사를 도전했던 거다. 또한 ‘아이 키우면서도 공부해서 해낼 수 있다’, ‘과거에는 불우한 환경이 문제였지만 난 이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게 컸고 ‘무조건 빨리 합격하고 사무실 내서 돈 벌어야 된다'는 아니었다. 돈 잘 버는 남편 있고(결코 부자는 아님) 자식 키우는 엄마 특 이라고 까내려도 대꾸 안 하련다. 뭐라도 해내서 집구석을 나가 내 가치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꼭 그게 한 길만 계속 파야하는 건 아니고 점점 늙어가는 중이니 하루라도 젊을 때 즐길 수 있는 걸 해야겠다.


어차피 정답없어 그냥 즐겨
심연이네...언젠가는 진정한 내 것을 알게 되려나..



 

 수험 자료를 받거나 과목 교수님께 질문을 하기 위한 수험생 단톡방이 하나 있었는데 시험 직전 서로 예민보스 다가 개싸움 나는 거 보면서 아휴, 다들 불쌍하고 다들 힘들구나 싶었다. 하나같이 살기 참 힘들다 말하는 요즘, 누군가의 글이 위로가 되려면 그게 성공기인 게 좋을까 아니면 실패담인 게 좋을까? 이 선택도 결국 취향이자 성격이고 때로는 각자의 지금 기분이겠지만, 실패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새롭게 계획을 다져보는 이 글이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면 좋겠다. 실패냐 성공이냐보다는 과정을 열심히 하다 보면 뭐라도 될 거라는 그런 막연한 위로일지라도.


에이 이건 너무 못 됐다
불행하다 죽으면 원귀 되서 괴롭힌대 그냥 다같이 행복하자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으로 버텨온 삶이었기에 이제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웃음을 주기를 바라본다. 작정하는 건 멋없고 아무쪼록 자연스럽게. 컴백 첫 글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앞으로는 다양한 주제로, 글 오마카세처럼 그날그날 끌리는 대로 내어보겠다. 벌써 막 신나는데?! 고민이 많은 여러분들, 모두 힘내고 파이팅 하자고요. 뭣도 아니지만 제가 글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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