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회차에 칼이네 영웅이네 다소 거친 이야기를 나눴으니 나름 균형에 신경 쓰는 사람으로서 오늘은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연년생 초등 아들 둘을 키우며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절친이 휴직 중일 때부터 부탁한 게 하나 있었다. 친구는 아들들을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다 학교 가는 멋진 엄친 오빠로 만들고 나서 3년 만에 복직했다. 그래, 대단하다 제군이여! 이제는 내 숙원 사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친구가 복직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동을 걸었다.
".... 좀 알아봤냐?"
"응. 그런데 이름이 너무 흔해서 그런가 너무 많아.... 어떻게 찾냐."
"일단 행정 교직원은 다 제치고 담당 과목명이 그때랑 비슷한 사람들만 추려보고 다시 알려줘."
한 참 시간이 흐른 후 친구에게 답이 왔다.
"어머어머 네가 말한 대로 추리니까 딱 한 명 남네? 메시지 남겨볼까?"
그때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친구에게 답이 왔다.
"야 내가 말 걸어봤는데 맞는 거 같아! 너는 딱 바로 기억하시고 나는 잘 모르시다가 나중에 기억하시더라. 이거 학교명이랑 연락처니까 한 번 연락해 봐."
내가 그렇게 정성스럽게 오래도록 기억에 품고 드디어 찾은 사람은 바로 나의 고2, 3 연속 담임 선생님이었다. 나만의 추억이면 어쩌나 했는데 20년이 지났고 계속 재직하며 숱한 제자들이 많을 텐데도 나를 딱 바로 아시더라는 친구 말에 안심이었다. 절친이 교사여서 인트라넷을 통해 이렇게 금새 찾아지는 건데 인생의 폭풍이 너무 오래 가는 바람에 딱 작년 이 즈음, 추석 연휴 지나고 확연히 선선해진 가을날에 그렇게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친구로부터 받아 적은 연락처를 꽤 한참 들여다보다가 후드득 떨어진 눈물은 꽤 오래 멈추지 않았다. 그만 생각하려고 해도 자꾸만 가장 버거웠던 시절이 계속 떠올랐다. 저번 회차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11살의 부엌에 주저앉아 울던 나라고 했는데 가장 오래 끔찍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고등학교 3년이다. 엄마는 미련하게 버티다가 내가 중3 때 드디어 바라던 대로 이혼을 하기는 했으나 조건이 있었다. 나의 학비와 대학학자금까지 대준다는 그 빌어먹을 조건 때문에 엄마가 모르는 3년의 고통을 겪었다. 학비를 준다는 명목으로 엄마가 일을 나간 시간에만 종종 나를 찾아와 그렇게 사람을 또 팼다. 이제 엄마는 못 패니까 더 패 댔다. 고입시험과 중학교 내신 합산 성적이 꽤 우수한 아이들만 모인 학교에 가자마자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별로 회복할 의지도 없는 사춘기가 그때 찾아왔다.
이혼을 했는데도 나만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이 많이 어이없었지만 이제 나랑 둘이 산답시고 아픈 몸으로 험한 공장일 하며 밤늦게 돌아와 쓰러져 자는 엄마에게 굳이 말할 생각도 없었다. 어쨌든 다 같이 살 때처럼 매일은 아니라는 미련한 생각과 함께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엄마에게 나의 힘든 이야기를 하는 건 늘 어려웠다. 그렇게 혼자만의 지옥에 갇힌 채 여전히 하굣길에 아빠 차가 단지 내에 주차된 걸 볼 때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곤 했다. 저번 회차에서 그 쓰레기에게서 무력감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고등학교 3년 동안은 무력감 그 자체였다. 더 이상 열심히 발버둥 쳐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좀 변태 같긴 한데 점점 나락이 되어가는 내 성적표를 보며 길길이 날뛰는 아빠를 보면 희열도 느껴졌다. 그나마 니 인생에 유일한 자랑이던 딸년 성적 이따위로 되고 평생 괴롭히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그러지도 못하고 미치겠지 지금 어? 진짜로 가끔은 아빠가 나가고 혼자 기절하듯 널브러져 있다가 갑자기 웃기도 했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고1 때 담임은 세련된 긴 펌 머리스타일에 늘 우아한 미소를 짓는 영어선생님이었다. 우리 반은 여자반이었는데 반 아이들이 대체로 그 담임 선생님을 참 좋아했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 우르르 몰려서 조잘거렸다. 나 빼고. 그 선생님도 나에게는 적당히 다가오는 척만 하고 말았다. 대체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학업 수준이 높은 아이들이 모인 학교여서 표면적으로는 다들 꽤 해맑고 목표가 바람직해서 나처럼 사냐 죽냐 하는 다크포스 물씬한 아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1 때 그 우아하신 양반이 다른 아이들과 우아함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나를 보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니까 내게 관심을 껐던 것 같다. 꺼진 관심에 불 지필 내가 아니기에 당연히 그 담임에게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지금 나의 진정한 고민은 학업이 아니라 살 수 있을까였는데 그저 상담시간마다 그 우아하고 세련된 미소로 '유 캔 두잇! 렛츠 두잇 썸띵, 롸잇? ^^' 이러는데 아우.... 그쪽이야말로 답이 없네요.
학교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걱정 없는 캐릭터가 되고 싶어서 학교 행사 때면 이 반 저 반 돌아다니며 코너를 짜고 수학여행에서는 사회를 봤다. 그 놀 줄 모르는 아이들을 놀게 좀 해보겠다고 반 미팅을 주선하고 술을 대짝으로 숙소 천장을 뜯어 숨겨놓는 꾼도 자처했다. 그렇게 조커처럼 노상 농담만 해대고 장난만 치는데 속은 증오가 가득한 아이였다. 드러난 모습이 인싸여서 두루두루 알고 지냈지만 정작 좀 친해지면 더 다가오는 게 불편해서 선을 그었다. 초중학교 때보다 여기서는 더욱 가정환경이 들통나고 싶지 않았다. 나처럼 성적이 좋은 다른 지역 아이들의 유입도 있었지만 그 학교를 주름잡는 아이들과 학부모는 대부분 학교 근처 아파트나 고급빌라 또는 단독주택단지에 살았다. 두 블록 넘어 공공임대주택단지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 바로 근처 중학교 학부모들이 그 공공임대단지 아이들은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서명 운동까지 벌어지는 동네였다. 나는 고입시험과 부모의 이혼 이후 이 학교에 합격하자마자 그 서명 운동의 문제적 단지에 살고 있었다.
겨우 2학년이 되어 가는 어느 날 학교에 새 바람이 불었다. 어느 학교에나 꼭 있는 소식통인 애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대거 들어온 교생 선생님들과 학과 선생님들에 대한 소식을 알렸다. 응 그렇구나. 그런데 조용히 좀 하자. 어제도 하도 맞아서 밤새 욱신거려 잠 못 자서 피곤해 잠 좀 자자.. 그런데 갑자기 어떤 말이 귀에 꽂혔다.
"야 근데 서울대 수석 졸업에 우리 학교 최연소 담임으로 오는 여자 선생님 있대. 얼핏 봤는데 포스 대박."
학업 성취도가 출중한 아이들이 모여있다 보니 학원 선생님들의 자기 스펙 까기에 익숙해서인지 거리낌 없이 학교 선생님들의 학벌을 물어보며 선생님들 레벨을 나누는 시건방진 아이들이 좀 있었는데 저 스펙은 그런 아이들조차 휘어 잡히겠다 싶었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서울대 및 몇 개의 학교만 대학 취급하던 그 학교 아이들에게 그녀의 주요 스펙은 큰 관심을 받을 만했다.
그렇게 애피타이저를 마치고 조회시간이 되어 운동장으로 나갔다. 나와 몇 살 차이 안 나는 여러 교생 선생님들 소개 다음 그녀의 소개가 이어졌다. 학년부장 선생님은 마치 히든카드를 내놓는 듯이 자랑스럽게 그녀의 스펙을 소개했다. 아이들은 이미 웅성거리고 있었다. 학년부장 선생님의 말 끝에 단상으로 올라온 그녀는 매우 깡말랐고 저게 도대체 몇 센티야 싶은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는데도 참 작았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살면서 스트레스에 짓눌려본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체격이 다들 좋은 편이어서 아이들 속에 서 있으면 잘 안 보일 것 같았다. 그리고 운동장 저 멀리에서 보일까 말까인데도 눈을 감았다 떴다 할 때마다 눈두덩을 거의 다 덮은 진한 아이라인 영역이 보였다. 그건 라인이 아니라 영역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치과목과 2학년 3반 담임을 맡게 된 이미숙(가명)입니다. 앞서 너무 띄워주셔서 좀 쑥스러운데, 아무튼 너무 반갑고 앞으로 잘해봅시다."
그전에 어린 티가 팍팍 나고 주절주절하는 교생 선생님들의 인사말과는 확실히 다른 그 포스는 정확하게 기억난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그 교생 선생님들과 4~6살 정도 많을 뿐이었다. 20대 아가씨의 화사함이나 파격적인 부임에 대한 상기됨 등은 다 생략된 채 간결하고 정확한 그 인사에 나는 입학 후 처음으로 선생님이란 존재에 조금 관심이 갔다. 나에게 그녀는 주요 스펙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그녀만의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 같다. 아니 근데 잠깐만, 2학년 3반? 헉, 나는 그렇게 11살 차이밖에 안 나는 그녀의 반이 되었다.
잠시 독특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게 뭔 상관. 학교를 다니지만 그 학교 아이가 아닌 것 같은 내 생활은 여전했다. 1학년 때 담임은 마냥 다 봐주는 사람이었다면 이번 담임은 그녀의 구두굽과 아이라인만큼 아찔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저 좋다고 달려들었다가 점차 학을 떼기 시작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다, 누가 저 선생님이랑 결혼하냐, 진짜 짤 없다 하면서. 얘들아 무슨 소리야. 결혼은 자기가 다 맘에 안 들어서 안 하겠지. 자기 원칙과 신념에서 사소한 거라도 절대 예외가 없고 매사 열정이 철철 넘치는 그녀의 모습은 꽤 준수한 아이들을 적당히 관리하며 편안하게 입시 성과를 유지하며 타성에 젖은 다른 선생님들과 사뭇 달랐다. 아이들이 담임에게 학을 뗄수록 나는 거꾸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난 갑자기 부반장까지 도맡았다.
나는 창밖을 보는 시간이 많았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이탈하여 옥상에 앉아있는 날도 많았는데 별 다른 터치를 받았던 적이 없다. 여자반이라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 굳이 화장실에 갈 이유가 없는데도 늘 피멍이나상처에서 나온 진물에 교복치마가 엉겨 붙어있어서 화장실에 가서 환복 하곤 했다. 그리고 때로는 몸이 너무 욱신거리고 아파서 도무지 체육은 할 수가 없어 다른 데가 아프다 하고 양호실도 자주 갔다. 누가 봐도 위태롭던 나에게 작년 담임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건드리지 말자. 알고 싶지 않다. 다른 애들 입시나 신경 쓰자'하며 버리는 카드 같았다. 어디까지나 느낌이긴 하지만 마흔이 된 지금까지 매사 느낌대로 살아오며 별로 틀린 적은 없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게 적중했듯이.
말했다시피 그녀는 될 성싶은 아이들만 건져가는 인성이 아니었다. 어느 날 늘 하던 대로 왁자지껄한 아이들 틈에서 혼자 창가를 보며 음악을 듣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담임이 쓱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뭐 그냥. 이것저것요."
"그니까 이것저것이 뭔데."
"말하기 싫은데요."
"그니까 그 말하기 싫은 게 뭐냐고. 너 혼자 그러면 뭐 멋있냐? 힘들기만 하지.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말할 때까지."
나 혼자 그러는 게 힘들기만 할 거라는 것을 말한 이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야 그게 참 감사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쓸데없이 참견한다 싶었고 그보다 아픈 곳을 들킨 기분에 불편했다. 훗날 나처럼 말 못 할 고민이나 가족에게도 의지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회복지 일을 했었는데 대상자들 대부분 초기 과정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너무 말하고 싶고 의지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말하기 싫고 거부하려는' 양가감정을 보인다. 난 그 감정을 고2 담임 선생님을 통해 경험했다.
암만
어느 날 체육시간에 주섬주섬 체육복을 들고 화장실을 가려는데 담임이 길을 막고 섰다.
"너 어디 다른데 안 좋지?"
"그런 거 아닌데요."
"웃기지 마. 체육 툭하면 빠지고 늘 화장실 가서 갈아입고 이상해."
"교실이든 화장실이든 내 마음대로 갈아입지도 못해요? 이상하시네요 진짜."
"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예민하냐? 더 이상하네 진짜."
"아 좀 귀찮게 하지 말고 비켜주세요."
"귀찮게 하는 것도 내 마음이야. 너 나랑 얘기 좀 해. 체육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해둘 거니까 교실에 딱 있어."
체육을 하든 빠지든 혼자 감당하던 시간에 갑자기 텅 빈 교실에 담임과 마주 앉아있으니 어쩔 줄 몰랐다. 지랄 맞은 내 성격에 훅 도망가면 그만이었을 텐데 또 곱게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이제 제발 뭔지 좀 알자."
"아실 거 없는데요."
"너 혹시 임신했냐?'
"아 무슨 소리예요 지금!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러면 왜 굳이 맨날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어? 뭐가 그렇게 툭하면 아프고?"
"그냥 다 싫어서 그래요."
"그니까 뭐가 그렇게 다 싫은지 좀 말해보라고 이제."
나한테 그렇게 집요하게 구는 선생님은 처음이었다. 아 이래서 애들이 학을 뗀 거구나. 성적 상담할 때마다 얼마나 푸시했을지 뻔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선생님인데 왜 그동안 나한테는 성적 상담 때마다 딴 소리만 주로 하다 성적 이야기는 대충 하고 말았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동안 아무도 관찰하지 않던 나를 꽤 세밀하게 관찰해 왔던 것 같다. 반드시 알고 말 거야 그런 그녀의 강력한 의지다.
그녀에게 홀린 걸까? 난 결국 그녀에게 교복 안의 참상을 드러내 보여줬다. 이러고저러고 살았어요 길게 떠드는 것보다 그냥 단 한 번의 그림이 나을 것 같았다.
"이래서 제가 늘 화장실에 가고 툭하면 아픈 겁니다. 됐죠?"
반 아이들은 물론 다른 반 아이들에게 독사네 독종이네 그런 말을 듣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유명강사 김창옥 교수의 말처럼 위로의 말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은 누군가가 나의 슬픔이나 고통을 같이 진심으로 슬퍼해줄 때이다. 어떤 해결책을 준 것도 아닌데 속이 약간 뚫리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눈물이 고인 채 나를 안았다.
"이제 나한테 다 말해주는 거다? 뭐가 됐든 말하는 게 안 하는 거 보단 낫더라."
"... 더 말할 것도 없거든요."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났고 깔깔거리며 아이들이 들어왔다. 그날 야자시간은 옥상으로 이탈하지 않고 얌전히 책상에서 공부했다. 공부하는 내내 아 괜히 깠나 그런 생각이 맴돌았다. 선생님은 아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를 무심히 지나 그저 자율학습 감독에 충실했다.
선생님이 모든 걸 다 알게 되었다 해도 그 시절은 지금과 달라서 가정 폭력은 신고해도 가해자에게 주의 주는 식으로 그치고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에게 돌려보내주는 병신 같은 체계였다. 게다가 형식적으로 이혼도 되어 있으니 문제는 다 끝난 걸로 치부되는 식이다. 나는 충분히 고통 속인데 더 큰 고통이 있어야만 좀 심하네 하며 인정해 주고 완전한 분리가 거의 안 됐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볼 일이 없었기에 꾹 버티려는 생각이 더 컸다. 뭔가 조치를 강구하는 순간 엄마가 또 힘들어할 것 같았다. 선생님은 혼자 이러지 말고 엄마에게 일단 말하자고 설득했지만 내가 그러면 콱 죽어버린다고 해서 더 강요하지는 않았다. 자기 원칙에서 예외가 없는 그 양반이 나에게는 그저 들어주고 섣부르게 구는 법이 없어서 내 생활은 여전했으나 응어리는 조금씩 풀려갔다.
경찰들아 이제 그 미친 소리는 관뒀니?
내가 고2였던 2002년은 역사적인 한일 월드컵 때였다. 워낙 공부 과몰입인 학교여서 고3 선배들 공부에 방해된다며 점심시간이든 저녁식사 후 야자 전 쉬는 시간이든 아예 텔레비전 수납장 자체를 자물쇠로 봉해버렸다. 워낙 샌님들만 모여있는 학교인데도 그때는 아이들 원성이 자자했다. 누가 가끔 자물쇠를 열려고 들면 학년부장 선생님이 잡아먹을 듯이 족치곤 했다. 우리 반 반장은 붉은 악마 회원이었는데 4강전이던 그날, 애가 아주 눈이 돌더니 나를 불렀다.
"반 애들 다 데리고 광화문 가자. 나 혼자는 힘들어. 반 씩 나눠서 내가 선두로 끌고 나갈 테니 나머지 반은 네가 끌고 와. 시간차가 중요하니까 내가 신호 주는 대로 와."
"재밌겠는데? 해보지 뭐."
내 인생에 짜릿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선동자는 반장이었지만 그걸 말리기는커녕 좋다고 나선 부반장이라니. 그것도 감히 원리 원칙 신념 절대 엄수인 이미숙 선생님의 반 아이들 전체가 야간자율학습 이탈이라니!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반 전체는 아니고 겁이 많은 일부 아이들은 남아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이 그 황홀한 제군의 행렬에 기꺼이 합류했다. 다른 반에는 절대 비밀 엄수. 저녁시간이 다가올 때 이미 우리 반 아이들은 가방을 다 싸뒀지만 안 싼 척 적당히 일부 책이나 펜 등을 흩트려놓는 치밀함을 선보이며 몇몇은 아예 가방도 두고 나섰다. 반장과 나는 마치 특수부대요원처럼 작전 수신호까지 짰다. 우리 반이 그렇게 단합이 잘 되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원래 학년부장 선생님은 야자시간에 튀는 아이들을 잡기 위해 교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때는 전교를 돌아다니며 행여 걸어 잠근 텔레비전 수납장을 열고 월드컵을 보는 애가 있을까 혈안이어서 오히려 정문이 뚫려 있었다. 그 선생님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지키고 있긴 했는데 반장은 치밀하게 그 누군가가 밥 먹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조차 계산하여 선발대 아이들을 인솔하여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내가 이끌던 후발대는 정문을 빠져나오는 중간 즈음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누군가에게 잡힐 뻔했는데 내가 필사적으로 목이 터져라 "그냥 다 앞만 보고 빨리 뛰어!!!!" 하면서 종용했고 결국 그는 어느 정도 달려오다 말고 규모가 너무 크다 싶었는지 포기하고 돌아서 선생님에게 보고하려고 달려가는 듯했다. 이미 정류장에 거의 다 도착해 후발대를 기다리는 선발대와 도망에 성공한 후발대가 다 같이 환호 지르며 난리도 아니었다. 매일 서로 얼굴 보고 웃을 일도 별로 없는 입시지옥에서 그렇게 서로 하나하나 얼굴을 마주 보며 손을 잡고 방방 뛰며 한껏 웃다 보니 나도 그 순간은 얘네들과 친구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와글와글 광화문행 광역버스에 몸을 실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지랄도
막상 도착해서 경기를 보는 동안은 너무 많은 인파와 때가 때인 만큼 위험요소도 많았고 데리고 온 애들은 다 여고생이니 나는 경기를 보는 것보단 아이들을 챙기고 가드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반 누군가에게 오빤데 하며 수작이라도 걸어오면 깡으로 막아서고 제 친구라고 덤벼들며 저리 가라 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에게 신신당부했다. 경기 다 보고 나면 무조건 바로 집으로 가라고. 나오는 건 일사불란하게 나왔지만 서울에 도착해서는 워낙 너무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다 같이 모여있는 것조차 힘들어서 흩어질 게 뻔했기에 도착하기 전에 경기 마치고 집에 가는 건 다들 알아서 가자고 했던 터였다. 그제야 사고를 단단히 쳤다는 게 실감 났다.
경기는 스페인을 누르고 4강에 진출했다. 다들 미쳐서 날뛰는데 키 작은 나는 덩치 큰 여러 사람들 속에 묻혀서 팔꿈치에 얻어맞고 아주 곤욕이었다. 점점 압사(壓死)의 공포를 느낄 만큼 압박감이 느껴졌고 안 되겠다 싶어서 근처의 아이들을 챙겨 서둘러 광역버스를 탔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연락을 돌리며 집에 가서 다시 연락 달라고당부했다. 인파가 어마어마해서 버스를 탄 순간부터는 연락 돌리기도 힘들었다. 집에 와서 몇몇 더 연락을 돌리고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나 전화 등을 몇몇 받으며 체크하다가 나도 작전 짜는 것부터 온종일 애쓴 통에 기력이 다했는지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니 학교 가기가 너무 두려웠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지. 모든 게 꿈이었으면.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나 문자 등 연락도 꽤 쌓여있었다. 그중에는 담임선생님의 부재중 전화도 있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교실로 가려는데 복도에서 학년부장 선생님에게 붙잡혀 바로 교무실로 끌려갔다.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담임 선생님부터 찾았다. 담임 선생님은 이미 한 차례 학년부장 선생님에게 호되게 당한 듯했고 자기 자리에서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하....
죄송합니다....
"너네 반 반장하고 얘기는 다 해서 더 물을 건 없고, 어제 집에 엄청 늦게 간 애들 계속 연락 안 되는 바람에 그 부모님들 연락 계속 오고 얼마나 난리였는지 알아?"
...... 하..... 쌍것들아 집에 바로 가라고 했잖아....!! 사고는 내가 쳐놓고 화가 났다.
"애들 누구 없어졌어요?"
"야!!!!! 지금 그게 중요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몰라 지금?!"
나로서는 어제 서울 광장에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가장 신경 쓰고 중요했던 거라 대뜸 한 질문에 학년부장 선생님은 길길이 날뛰며 나를 몰아세웠다. 워낙 아빠의 숱한 쌍욕 퍼레이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거에 능통해서 그러려니 하고 버텼다. 오히려 괴로운 건 담임선생님 앞에 섰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담임 선생님은 내 말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서 있다가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을 또 했다. 잠시 후 팔을 내리고 나를 보는 선생님의 눈은 매우 차가웠다.
"우선 없어진 아이는 없어. 늦게 들어간 아이들이 몇 있었지만 다 잘 들어갔고 사고 같은 건 없었어. 하지만 네가 벌인 일은 충분히 누가 없어지거나 사고가 날 만한 위험한 일이었어. 다시 그러지 않겠지만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일이었다는 거 잊지 마. "
그렇게 담임 선생님은 학년부장 선생님에게 듣지 못한 대답부터 먼저 해줬다. 사고를 친 녀석일지라도 불안해하는 학생을 안심시키는 게 먼저인 담임 선생님의 모습은 훨씬 오래 일해왔어도 자기 체면과 분노가 먼저인 학년부장 선생님보다 더욱 교사다웠다. 그래서 진심으로 죄송했다. 결국 담임 선생님은 그 사건으로 인해 경위서를 썼다. 여러 면으로 나는 그녀에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제자다.
그렇게 1년이 또 지나갔고 이제 고3 반 배정을 앞둔 어느 날, 소식통인 한 아이가 내게 음흉한 미소를 짓고 다가왔다.
"야! 너 어떡하냐 ㅋㅋ 너 또 이미숙 선생님 반인 듯 ㅋㅋ 대박 ㅋㅋ."
... 다들 웃겨 죽겠다는 듯이 웃는데 나는 내심 좋아서 웃었다. 그래도 그녀와 함께라면 졸업 때까지 덜 외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1 때 같은 반이던, 아까 말한 교사가 된 절친을 고3 때 같은 반으로 또 만나니 그것도 좋았다. 비록 너무 오래 놔버린 공부를 뒤늦게 한답시고 했지만 메워지지 않았고 수능이 다가올수록 좌절은 커졌지만 툭하면 이제 애 학교 안 보낼 거라며 황당한 전화를 하는 아빠에게 언제까지 애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줄 아느냐며 호통치는 그녀 덕분에 조금은 정신줄을 잡을 수 있었다.
작년 이 즈음에 드디어 선생님을 만나서 들어보니 우리 학교 전에 첫 부임은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이 태반이었던 곳에 계셨는데 거기서 매일 마음 아프게 일을 하다가 우리 학교에 부임하여 첫 조회시간에 단상에 올라 아이들을 내려다보는데 아이들의 키, 낯 빛, 표정 모두 그 학교 아이들과 너무나 다르게 훤칠하고 말끔해서 울컥하셨다 했다. 그러다 나를 보니 처음 그 학교 아이 같은 애가 하나 있네 싶으셨다고. 늘 아빠가 말도 안 되는 어깃장에 쌍욕을 해댈 때마다 지지 않고 말짱하게 받아쳤어도 늘 전화를 끊거나 우리 집에서 나오는 길에 우셨다고 한다. 어떻게 저런 아빠가 있을까 싶어 화나고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눈물 나더라나. 하지만 내가 그때 그녀의 나이와 같은 29살에 청소년복지 일을 할 때 별별 진상 부모 많이 겪어봤지만 학생을 위해 그렇게까지 맞서고 보호하는 건 쉽지 않다. 분명 그 작은 몸의 아가씨가 무서웠을 텐데 단지 자신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로 지옥에 갇힌 나를 처음으로 찾아내고 그 지옥 속에 함께 갇혀서 손을 잡아준, 내 인생에서 엄마 다음으로 가장 감사한 분이다.
수능을 당연하게 망치고 다음 날 기말고사를 다 포기한 채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담임선생님이었다. 헉. 오전 9시 20인데 이 시간에?
"야 빨리 옷 입고 튀어나와라. 지금 바로 가면 다 찍어서라도 낼 수는 있겠네."
"아 무슨 소리예요 지금. 나 시험 안 볼 거라고요. 봐서 무슨 의미예요 내가."
"의미고 뭐고 됐고 그냥 빨리 나와. 다 찍어도 되니까 나와 빨리. 나 춥다."
무시하고 자려는데 더 잔소리도 없이 같은 패턴으로 띵동 띵동 쾅쾅해 대는 소리에 복도식 아파트라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결국 개 짜증을 부리며 교복을 입고 확 문을 다시 여니 그녀는 자기가 이겼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학교 아이들 모두 그녀를 참 무서워했는데 가끔 그녀의 귀여운 구석을 보는 건 나만의 특권이었다.
"왜 왔어요. 또 무슨 봉변을 당할라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요."
"야 걱정하지 마.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너도 나도. 야 이제 뛰어야겠는데."
그렇게 교실에 헐레벌떡 들어간 1교시 영어 시험은 진짜 다 찍었는데 어떻게 80점이 나온 건지? 내 인생에서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중 하나다.
지금 나만 미친 게 아닌 거 같다니까??
- 지금은끝이 안 날 고통처럼 느껴지겠지만 계속 이러지 않을 거야. 넌 결국어른이 될 거고 부모라는 이유로 계속 당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분명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자유로워지는날이 올 거야. 그런데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그런 날은 아예 없겠지. 고통 끝에 없어지는 것보다는 고통을 이겨내고 살면 어쨌든 더 낫지 않을까. 일단 버티고 지나가면 너의 날들이 올 거야. 그리고 다시는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누군가와 힘듦을 나누고 덜면서 살면 좋겠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 미안하다.-
이건 선생님이 나에게 고등학교 졸업 전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자 일종의 구원이었다.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면서 선생님의 연락처로 드디어 전화를 걸었다.
개인 연락처가 아닌 재직 중이신 학교 직통 전화였는데 몇 차례 전화를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았다.
연락처를 알아봐 준 절친과 나는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람 진짜 절대 안 변한다더니 맞는 말이구나 하며 또 한 번 학을 뗐다.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열정. ㅋㅋ첫사랑 찾으면 대부분 많이 변한 모습에 실망한다고들 하던데 적어도 예상한 대로 살고 계셔서 더 반가웠고 만남이 기대됐다. 연락처와 이름을 남기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전화가 왔다.
"일화니?"
인생이 하도 구려서 오래전 개명을 한 터라 참 오랜만에 듣는 나의 옛 이름이다.
"선생님 목소리가 어쩜 그대로시네요."
"그래? 너한테 연락이 한 번은 올 거 같긴 했는데. 날 찾는 거보니 이제 편안해졌나 보다 그런 생각도 했고."
"저야 늘 선생님 한 번 찾아봬야 하는데 생각했죠. 언제 뵐까요."
그렇게 금방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 건너편 갓길에 주차를 하고 선생님께 드릴 선물과 손 편지를 잘 챙겨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길을 건너는데 테라스 자리에 앉아있던 선생님이 성큼성큼 뛰듯이 벅찬 표정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 모습에 이미 울컥했다. 정말 내가 이제 잘 사나 궁금해왔던 게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는 11살 차이 큰 언니 같았다면 내가 마흔이 되어 만난 선생님은 대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 같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그때 아이들끼리 장난처럼 하던 말 그대로 여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계셨고 최근 몸이 많이 아팠던 이후로 쭉 비건 식단을 하고 있고 가족 일 등 여러 계기로 수계(受戒)를 받으셨다고 했다. 선생님의 모든 맥락은 그 시절 그녀와 다 연결되었다.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그 영역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두터운 아이라인과 아찔한 구두는 없어졌다. 나도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쭈욱 풀었다. 선생님은 한 참 듣더니
"너는 그때 이후로도 뭐가 또 많았네 힘든 게. 그래도 지금 잘 살고 있으니 참 대견하고. 그리고 이렇게 기억해 주고 찾아줘서 고맙다."
그 시절에 너무 감사했다고, 나에게 구원이나 다름없었다고, 선생님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이제는 드디어 모든 게 다 끝나고 어른이 되었다고, 진짜 그런 날이 오긴 오더라고, 이제는 좋은 사람 만나서 의지하고 딸 키우며 잘 살고 있다고, 그때 못한 공부를 하며 늘 바쁘게 살고 있다고 말하며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고심 끝에 산 꿀 선물을 손편지와 함께 드렸다. 거의 안 가는 백화점에 물건 잘 고르는 친한 동생까지 대동해서 나름 정성으로 준비한 선물이었다. 최근 아프셨다는 건 만나서야 알았지만 그 시절에도 고작 10월부터도 바들바들 떨던 깡마른 모습이 생각나서 고른 선물이었는데 제대로 잘 샀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몇 시간 동안 밥도 잊은 채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은 편찬을 맡은 일을 하러 시간을 맞춰둔 게 있어서 들어가 봐야 한다고 하셨다. 아쉬운 마음에 마중을 나서 걷다가 헤어지기 전 꼭 안아봤다. 작은 내 몸에도 작게 느껴지는, 작은 거인. 이제 다시 건강해지시길 바라면서 종종 부담스럽지 않게 가끔 연락하고 지내야겠다 생각하면서 헤어졌다. 왠지 바로 집에 가기 싫은 기분에 홀로 스시바에서 혼밥을 천천히 즐기다가 두 시간가량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그날 밤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다. 마음이 담긴 편지 정말 고맙다. 그 시간들을 잘 견뎌주어서 더 고맙다. 요즘 교사로서 나 자신에 대한 여러 생각이 많았는데 네 편지를 보다 보니 그래도 괜찮은 선생님이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힘이 되었단다. 항상 자신을 믿고 남편과 아이와 더 행복한 일들을 많이 만들어 가기를 늘 뒤에서 응원할게."
그로부터 얼마 뒤 그날갓길에 주차한 걸로 딱지가 날아왔지만그까짓 거 기쁜 마음으로 낼 수 있었다. 벌써 선생님을 다시 만난 지 1년이 지났다. 요즘 몸은 좀 어떠신지 내일 날이 밝으면 안부 문자 하나 남겨야겠다. 여러분들도 인생에 감사한 분이 있다면 꼭 한 번 만나 뵙기를바란다. 그분을찾는 당신도, 당신을 만나는 그분도인생이 한 번 더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P.S. 선생님께서 이 글을 보시고 연락이 오셨다.
"네가 모르는 비밀 하나 말해줄까? 광화문 탈출 사건은 반장과 나의 합작품이었다. 난 알고 있었고 나머지는 연기를 한 건데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귀가가 확인 안되는 아이들때문에 너무 위험한 모의에 동의한 나를 자책했단다. 나도 그 때는 20대의 젊음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