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시험이라는 큰 쓰나미가 지나가고 브런치 에세이 정기 발행을 시작했다. 에세이 완결 후 새로 발행할 두 번째 기획도 완료하고 그에 필요한 책들을 읽으며 또다시 공부하던 때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화를 읽었다면 알겠지만 이미 시험 당일 남편의 친절한 가스라이팅을 통해 내년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을 희박한 가능성보다는 글쓰기를 하면서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4년을 쥐어짜서 공부한 것에 비해 미련이 참 없고, 그저 글 작업하며 흥얼흥얼 신났다. 원래 고민 오래 못하고 자기반성은 짧고 결정과 추친은 빠른 ESTP 특이다. 그러고 보니 MBTI가 성격의 전부는 아니지만 ESTP랑 법무사는 진짜 안 어울리긴 하다. 내 기질 생각 안 하고 그냥 해보고 싶어서 대책 없이 공부한 거 조차도 ESTP 특이다.
자기랑 딱 맞는 일 하며 즐겁게 현생 사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업종불문하고 우직하게 일하는 모든 분들 참 존경스럽다. 마누라 법무사 사무실 잘 되면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하려고 지긋지긋해도 꾹 참고 프로그래머의 삶을 버티는 우리 남편 포함이다. 독학이었어도 인강, 교재비 은근히 들어간 거 남편이 투자하는 심정이었을 수 있는데 ㅋ 이제 그냥 너 좋아하는 거 하고 살라고, '글만 왕창 써 놔 봐. 돈 되게 만드는 판은 내가 다 짜줄 테니' 해줘서 든든하다. 며칠 전 '그게 뭐가 되겠니. 다시 복직이나 하는 게 어때' 하며 명절 특 간섭 찬 물 끼얹는 우리 엄마보다는 백번 낫다. 그래도 엄마 밥 너무 맛있었으니까 참을게.
싫은데?! 내 마음대로 살 건데?!
아무튼 공부한 건 아까우니까 내년에는 합격여부를 떠나 시간 내에 다 풀어보고 싶어서 문제풀이는 조만간 다시 하려고 한다. 그렇게 자꾸 도전하다 언젠가 붙게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올해 경쟁률은 63.5:1이었는데 내년 경쟁률은 몇 일까? 벌써 너무 기대된다.^^ 절실해봤자 가망이 없다면 별로 안 절실하게 구는 것도 방법이다. 이건 오래전 병원에서 나보고 가망 없다고 했음에도 살아난 방법이기도 하고. 꼭 살려고 발버둥 안 치니까 살아지더라.(어차피 살 팔자라 산 걸 수도) 이게 되는 일인지 안 되는 일인지 모르겠고 안재현에게 '너 한 번만 안아봐도 되냐'라고 말하는 서인국처럼. 아... 그런데 이 둘은 그냥 절실한 건가? 어쨌든 모든 일은 내 품에 안아봐야 답이 나온다.
어머 어머 어머!
빠른 회복탄력성에는 성격 특 외에도 시험 일주일 후 생일인 것이 한몫했다. 내 나이 즈음 전후로는 다들 생일이 무슨 의미냐 대수냐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은데 나는 아직 철이 안 들어서(안 들기로 선택한 거다) 생일이 다가오면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들뜨는 편이다. 예를 들면 생일 주간이니까 예쁘고 노트북 하기 좋은 카페에 가서 평소에 잘 안 먹는 디저트를 먹으면서 일을 하는, 소소하지만 꼭 챙기는 행복을 누리는 식이다. 남편과 아이도 생일 며칠 전부터 이번 생일에 뭐 해줄지 각자의 계획을 굳이 보고해 주니 그 나름대로, 가족은 나의 힘! 그런 나랑 잘 안 어울리는 문구도 얼핏 떠올랐던 일주일이다.
어느덧 생일날이 되었고 마침 주말이라 글을 쓰다 늦게 자서 아침 10시 넘어 일어났다. 초1 딸은 식탁에 앉아 레고를 하고 남편은 거실에서 소파에 누워있었다. 둘 다 나랑 다른 대화는 하는데 생일 축하 한마디가 전혀 없었다. 혼자 속으로 짜증을 내어봐야 누가 알아주나 싶어 소파에 있는 남편의 멱살을 잡았다. '인간아! 내 생일이거든?' 하면서. '아 맞다!' 그러더니 남편은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밥을 안쳤다. 미역국은 이미 있어서 됐고(엄마가 며칠 전 해주심) 어제 먹다 남은 등뼈김치찜도 있고, 외출 나갈 거라서 그냥 두부감자조림이나 하나 더 해서 먹을 생각으로 눈뜨자마자 바지런을 떠는데 식탁에서 놀던 아이는 여전히 축하 한마디가 없었다. 넌지시 '엄마 생일인데'라고 말하니 '응 알아.'라고만 대답하는 딸. 하... 구질구질하지만 축하 안 해주냐 말하니 나를 화나게 한 그 말,
"나도 내 생일에 축하 안 받으면 되지 뭐~~~"
... 확 다 엎어버릴까?! 초1이 되고부터 종종 말을 기분 나쁘게 하고, 짜증이 늘고 꼬투리 잡거나 우기는 게 심해서 자주 혼냈고, 아이의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는 남편 때문에 화가 나서 싸우는 일이 많았는데 내 생일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건, 역린을 건드린 거다.
진짜 역대급...
남편은 생일 전 날, 운동 갔다 들어오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자두를 한 봉지 사 왔고 아웃렛에서 돈이라도 쓸거라 치고, 그저 축하한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또는 작년처럼 쪽지 편지 하나 귀엽게 써주면 될 것을, 며칠 전까지도 자기 용돈으로 엄마 커피랑 디저트 사주고 싶다고 말해놓고 얘가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건데.. 요즘 아이와 나는 가장 가깝고 가장 노력하는데도 가장 힘든 관계다. 오은영 박사의 대인기로 인해 요즘은 자식이 원수다라고 말하는 순간 네가 먼저 원수같이 굴었겠지 그런 욕이나 먹을 거 같아서 이제 자식 때문에 힘들다는 토로도 함부로 못하니 답답하고 지친다. 나름의 정성으로 키우며 매년 아이 생일마다 온갖 반찬 가득한 생일상과 좋아하는 과일 넣은 주문 케이크, 선물까지 늘 챙겼는데! 왜 딸은 작년과 달리 축하는커녕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일까. 내가 부모라면 당연히 할 일을 해왔듯이 축하 정도는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주는 게 맞지 않나? 시험 망했어도 정신줄 잘 잡았던 ESTP특이나 빠른 회복탄력성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다음 달이 지 생일인 건 알고 떠드는 건지.... 진짜로 이번 아이 생일에는 아무것도 안 할 작정이다. 축하 안 받으면 된다고 했으니 감당하렴. 이제 네가 말하는 대로 상황이 벌어질 거란다. 남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밥 빨리 먹어. 치우고 아웃렛 가게.' 하면서 눈치껏 설거지를 해댔다. 뒷골이 땅겼지만 그래, 나가서 돈 쓰는 게 최고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차를 탔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음악에 흥얼거리며 춤을 추는 딸 모습이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 졸리지도 않은데 눈을 꾹 감았다. 30분 만에 아웃렛에 도착하자마자 키즈카페에 아이를 두고 나왔다. 지금은 우리가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고 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 요즘이다.
아이는 자기 생일을 손수 파묻고~ 나는 그냥 딱 이 심정 ~
웃기지 마 작년에 넌 더 어렸는데도 다 알았어
7살까지 어린이집을 다니다가 졸업한 딸은 기관에서 친구와 동생들, 선생님들까지 살뜰히 잘 챙겨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손재주가 좋고 늘 밝은 성격에 적극적이어서 활동마다 칭찬도 많이 받고 특유의 무릎을 탁 치는 유머감각과 빼어난 춤솜씨로 눈에 띄는 아이였다. 입학 첫날부터 낯가림은커녕 박장대소하며 잘 노는 모습에 이미 원장님의 원픽이 되어 순탄대로였다. 고물고물 다 해주는 엄마 스타일이 아니라 스스로 할만한 것들은 일찍부터 트레이닝해 왔기에 이미 6살 반부터 혼자 밥 먹고 씻고 문제집 스스로 푸는 거 정도는 잘 되던 아이였다. 아기 시절에도 투정이란 게 별로 없었고 배변이나 기타 발달과제도 금방 잘 해냈다. 늘 독박육아임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살림과 육아에 매몰되지 않고 공부와 운동 등 바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아이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커갔고 그다지 힘들지 않게, 키울 맛이 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다들 자기 자식이 학교에서 수업시간을 잘 버틸지,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잘 갔다 올지, 급식은 알아서 잘 먹고 치울지, 친구들이나 선생님과는 잘 지낼지 온갖 걱정들을 할 때 나는 그 모든 것을 잘하리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확신과 달리 학기 초 두 달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훅 나가서 복도를 서성이기도 하고 도무지 집중을 하지 못한다며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자주 왔다. 수업시간에 하는 활동지를 마무리 못하고 남겨오는 일도 많았다. 담임선생님은 물론 고3 담임인 절친도 하는 말이 1, 2학년 때 학습태도를 다잡지 못하면 나중에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에 지금 다잡아야 한단다. 4월까지 두 달은 산만함을 잡고자 내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부단히 애쓰며 지나갔고 이제는 수업시간에 열심히 잘한다는 피드백을 받고 난 뒤 한동안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팔꿈치가 많이 까져 피가 나는 채로 집에 온 날이 있었다. 누가 자기를 밀어서 그렇게 됐다고 지목하기에 담임선생님께 상황을 말하고 사진을 보낸 뒤 지목한 아이 어머니로부터 사과 전화를 받았다. 속상했지만 일단락했는데 다음날 아이가 학교에 가자마자 담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아이 어머니가 자기 아이가 한 게 아니라고 하면서 지금 학교로 찾아오셨으니 어머님도 오시는 게 좋겠다면서. 세수만 겨우 한 채 아무거나 집어 입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또, 내 아이의 말이 맞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사람을 잘 안 믿고 매사 의심이 많은 편이면서 자식과 관련된 일에는 왜 이토록 자꾸만 추호의 의심이 없었을까. 교실 옆 연구실에서 담임선생님, 나, 그 아이 어머니, 다른 아이 2명까지 더해져서 5자 대면을 한 결과, 딸의 말은 일부는 맞고 결정적인 부분이 맞지 않았다. 딸을 데리고 복도 한편에 따로 나가서 대화를 다시 해보니 다치기 직전 그 아이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과 서로 편이 갈려서 실랑이가 있었고 하교시간이라 와글거리는 복도에서 누군가에게 밀쳐진 건 맞는데 그게 그 아이는 아니었다.
자기야 나 지금 어떻게 해야 돼? ㅜㅜ
전 날은 재차 몇 번을 확인해도 그 아이가 그랬다고 울면서 호소했던 딸과 다음 날 학교 복도에서는 '걔가 아 닌 것 같다'는 딸의 모습의 확연한 차이에 너무나 화가 치솟았다. 이 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난 순식간에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어 그 아이 엄마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좀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너무 내 자식말만 믿었다, 너무 죄송하다.... 다행히 그 아이 어머니가 일전에 다른 일도 있어서 오해할만했다며, 자기도 아이에게 더 신경 쓰겠다며 사과를 받아주었고 아이들은 그렇게 일단 교실로 복귀하고 그 아이 엄마와 나는 대화를 소소히 나누며 정문까지 가다가 헤어졌다. 그날 도무지 집으로 바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집 뒤에 있는 유채꽃밭을 멍하게 걸어 다녔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남편도 적잖이 당황스러워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어떤 아이에게 너무나 험한 말을 해서 담임선생님조차도 정말 네가 그랬냐고 되물을 정도로 놀라는 일이 있었다. 작년까지는 예쁜 말만 하고 뭐든지 잘한다던 아이가 무슨 날벼락인지. 게다가 학교 수업 관련한 이슈는 많았어도 친구들과는 잘 지낸다고 하셨는데 정말 믿기 힘들었다. 그날 하교 후 돌아온 아이와 이야기해 보니 그 친구랑 잘 놀고 싶은데 마음처럼 안 되니 화가 나서 아빠가 밤에 보던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던 말을 따라 했단다.... 그때 한창 남편이 복수극에 빠져있던 터라 뭔 말인지 알겠어서 늦게 집에 온 남편에게 그런 거 볼 거면 영상을 잠시 끄던지 애 잘 때만 보라고 일침은 했지만, 여태 키워 온 딸을 알기에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놓고 핑계 삼는 것 같아 괘씸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딸은 다음 날 그 친구가 하교 후 가는 돌봄 교실로 찾아가 몇 번이고 재차 사과했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가 불안해 보이니까 발달센터에 가서 상담받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권장했다. 아... 억장(億丈)까지는 아니고 천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지금 기분에 빠질 때가 아니야. 일어난 일은 진짜고 이제 내가 할 일을 찾자. 나는 담임과의 전화를 끊는 즉시 동네 아동발달상담센터에 예약을 잡았다. 상담 당일 하교 후 아이와 나 모두 풀세팅하고 브런치 하러 나온 듯한 차림새로 억지로 텐션 올린 채 길을 나섰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미칠 것 같았다. 5월의 어느 날, 엄마 나 병원 가는 거야? 라며 해맑게 구는 딸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나니 나 편하자고 7살까지 유치원으로 옮기지 않고 어린이집을 쭉 다니게 한 것도 문제 같고 남편이 내가 너무 타이트한 엄마라고 핀잔주던 거도 생각난다. 내 운동, 내 공부 시간 줄여서 아이와 더 함께 시간을 보냈어야 했나 싶지만 그것마저 포기하기는 여전히 싫고 어쨌든 오은영 박사 말대로 결국 내 문제인 거겠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언더독 작가의 글을 읽다가 엄마들이 아빠들과 달리 엄청난 인내심과 차분함과 인자한 미소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은 아이들이 맛탱이가 가는 것을 예방한다고 쓴 걸 읽고서 아! 나는 그런 엄마가 진짜 아닌데?! 그래서 우리 아이가 드디어 맛탱이가 간 건가?! 싶었다.
엄마답게 해야지! 해냈어야지! ㅜㅜ
상담센터에서는 작성할 것들이 참 많았다. 온갖 불행이 연속했던 과거의 삶에서도 상담받아 본 적 없이 굳건하고도 발랄했던 내가 자식새끼 때문에 상담이라니. 꽤 오래 이것저것 적는 동안 아이는 상담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노는 듯한 무드 속에서 관찰 및 초기상담이 진행됐다. 상담지를 낸 후 나의 상담이 이루어졌고 그동안 아이는 상담실 밖에서 놀았다. 많은 것을 물어오고 많은 것을 답하며, 먼저 했던 아이 상담 내용까지 더해진 초기상담의 내용은 이러했다.
'인원이 많지 않은 기관을 오래 다니면서 집중적으로 관심받고 사랑받다가 커다란 학교의 한 학급의 일개 아이로서 관심을 받고 싶어 일시적으로 산만하고 특이하게 구는 행동일 가능성이 큼. 경증의 ADHD기질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현재 어머니의 집중케어로 학습태도가 금세 개선된 것으로 보아 그마저도 아닐 가능성이 있음. 일단은 바로 검사와 정기상담을 권장할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됨. 확실하게 그 기질이 보이는 것이 아님에도 40만 원의 검사를 진행하기엔 무리가 있음. 좀 더 학교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스스로 학교는 원래 이런 곳이고 이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가며 적응할 것으로 기대됨. 추후 여전하다 싶으면 다시 내방하길 바람.'
여러 노력을 한 것도 있고 아이가 적응해 간 것도 있고, 정말 다행히도 상담센터 내용처럼 점차 정기 상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일상을 되찾았다. 방학식날 받았던 생활통지표 내용은 무난함을 넘어 준수하기까지 했다. 학교 공사로 인해 첫 방학이 너무 길었지만 방학이 긴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또다시 방학 중반 이후부터 스멀스멀 아이 때문에 화나는 날이 늘었고 처음엔 아이만 감싸던 남편도 점차 아이를 혼내는 일이 많아졌다. 셋 다 지쳐가다가 개학이 왔고, 개학 후 바로 다가온 내 생일에 딸이 또 이러는 거다.
아웃렛에서 남편과 단둘이 내 가방을 사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이제는 남편이 계속 더워죽겠다고 난리다. 이래서 실내 쇼핑몰 가자 하지 않았냐면서. 후... 막상 물건을 고를 때는 정성껏 피드백해 주고 나보다 더 신중하게 골라주는데 다른 데로 옮겨가는 짧은 길목의 더위를 못 견디는 거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빨리 살 수도 없는 거고 옷이 젖어갈 정도로 땀을 흘리는 남편을 보니 불쌍하긴 해서 일단 잠깐 카페 가서 커피 마시면서 땀 좀 식히자고 했다. 그런데 또.. 스타벅스 커피는 너무 싫다면서 굳이 두 개나 버젓이 있는 스타벅스 매장을 뒤로한 채 다른 커피집을 찾으며 땀을 계속 더 흘리는 남편을 보니 이제는 내가 미칠 것 같았다. 아 이번 생일 왜 이러지 그런 기분이 들 때쯤 남편은 포기하고 제 발로 스타벅스를 들어갔다.(스타벅스 관련 임직원분들께는 유감이지만 개인의 취향이 그런 건 어쩔 수 없고 제가 대 스타벅스를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단순하게도 카페에서 땀이 식어가며 처음 시켜본 블랙 글레이즈드 라테가 너무 맛있어서 금세 기분이 나아졌다.
속으로는 이랬는데 가방 안 사줄까 봐 겨우 참았네.. 잘했다 나 자신..
애초에 '수납력이 좋은 큰 가방'이라는 활용도가 정해진 쇼핑이어서 카페에서 차분하게 안정을 취하며 ㅋ '나가는 즉시, 그러나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기 위해 둘이 머리를 맞댔고우리는 다시 환상의 팀워크를 발휘하며 5분 컷으로 성공적인 구매를 완료했다. 흡족한 기분으로 키즈카페에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아이 입술이 퉁퉁 부어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점핑 코너에서 자기 무릎에 부딪혀 터졌다고... 전화를 계속 드렸는데 안 받으시더라며.. 쇼핑 중간에 배터리 방전으로 폰이 꺼져있었다. 진짜 이번 생일 왜 이러니!! 이제 알겠다. 다들 이런저런 걸 겪어보며 결국 내 나이즈음이면 생일이 무슨 의미냐 대수냐 하게 돼 버린다는 것을.
아웃렛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아이가 씻던 중에 40여분이 지나서 나를 부르기에 다 씻었나 보다 했더니.. 하나도 안 씻고 새로 산 바디샤워를 반 통 가까이 바닥에 다 부어가며 놀고 있었던 거다... 하루종일 나와 아이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남편도 아이가 계속 장난한 게 아니다, 이게 장난인지 몰랐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니까 분노 버튼이 눌러졌고 아이는 결국 꽤 혼났다. 남편은 화장실에서 나오며 나에게, 할 만큼 했으니 넌 아무 소리 말라고 했는데, 마무리하려고 화장실에 들어서니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를 보다 이제 나의 분노 버튼이 눌러졌다. 티키타카 안 맞게 왜 그러냐며 남편은 화를 냈고 나는 '지금 쟤가 노래를 하잖아!!!!'하고 맞받아치면서 부부싸움으로 화려하게 끝을 맺었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흐엉
아이는 눈치가 보이긴 했는지 원래 잠들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인데 금세 잠이 들었다. 친구나 지인들 축하메시지에 답장 보내고, 받은 선물들에 배송지 입력하고 sns 좀 하다 보니 밤 12시가 다 되어 생일이 이렇게 끝났구나 하다가 갑자기 뭔가 하나 안 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생. 일. 케. 이. 크. 부부싸움 엔딩보다도 더 서글펐다. 거실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말하니 아웃렛에서 집 오는 길에 사 오려고 하다가 깜박했단다. 허둥지둥 배민앱을 열면서 빵집은 문 닫았겠지? 하는 남편. 아휴 됐어 맥주나 마시자 하니 그래도 냉동실에 있던 불곱창볶음 밀키트 꺼내 쑥갓, 청양고추, 대파 팍팍 넣고 안주 대령해 줘서 용서해 줬다. 작년에는 있었던 딸의 사랑스러운 축하 쪽지와 생일케이크 사진을 보면 울적하지만 새로 산 가방은 요새 노트북 넣고 다니면서 너무 잘 쓰는 중이라, 자식보다는 남편이고 돈지랄이 최고라는 생각이 드는 생일이었다.
한편, 나는 왜 작년과 다르게 생일 축하 한 마디를 받지 못하는 엄마가 된 것일까 생각해 본다. 딸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이 틀렸듯이, 늘 최선을 다하고 옳다고 믿었던 내 방식이 틀린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는 중이다. 지인들이 나더러 애 키우며 공부, 운동, 글쓰기 다한다고 갓생 산다던데 그게 육아에 있어서는 아이가 할 일을 미루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꼴을 못 봐주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동일시할 필요 없는데 동일시하려고 한달까. 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이에게 좋은 동기부여가 되길 바랐는데 기대와 다르기도 하고. 아이에게 유연해지려고 노력하는데 기질이 나와 많이 달라서인지 남편 말마따나 내가 성격파탄이라 그런지 참 어렵다. 그동안은 책임감으로 버텨온 시간들인데, 이제 책임감만으로 되는 시기는 지났구나, 학부모로서 아이의 기질과 성향을 잘 파악하여 다루고 자기 주도적인 학습태도도 잡아가는 섬세한 양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첫 학기는 걱정 없이 시작했다가 전쟁통이었는데 부디 2학기부터는 나도 아이도 더 성장하기를 바라본다. 허나 반성은 반성이고, 일단 다음 달 아이 생일상은 진짜 안 하련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내 특, 그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