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저 Sep 17. 2022

여름의 단상

뉴스레터 <막차> 9호 백업

어렸을 땐 여름을 그리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놀이를 즐기지 않아서일까. 그렇다고 더위를 많이 타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지만, 여름에 대한 기대가 왜 어린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초봄에 태어난 탓이라 여기기도 했으니.


그러나 여름이 싫은 것은 아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아닌 애매한 선호도를 가진 나의 여름은 의미심장한 계절이다. 거리를 걸으면 마스크 안에 땀이 잔뜩 맺히고, 실내에 들어서면 마른 땀이 온몸을 오싹하게 하는. 이런 여름에도 좋아한 것들이 있다. 바로 여름의 일본!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시원한 나마비루를 마실 수 있다면... (이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겠지만.) 이 에세이를 쓰다보면 해결법은 또다시 술에 대한 예찬으로 도달한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이전의 여름에는 일본에 종종 갔었다. 적어도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일본의 여름에는 어떤 나츠야스미夏休み의 환상이 있다. 채도와 명도를 잔뜩 올리고 세피아의 빛번짐으로 꾸며낸 맑은 여름의 황홀경. 그림같은 솜사탕 구름과 그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비에 젖은 정원의 아득함. 매년 생경한 빛깔로 가득한 녹색과 푸른색의 수채화같은 여름.


그런 아름다운 여름만 겪었다면, 그 여름 속에서 사랑과 우정이 싹트고 기차의 음성 안내를 들으며 우연한 만남을 품고 돌아왔더라면... 좋았겠지. 하지만 내 이야기의 결말은 희극이다. 우리에게는 사소한 여름의 기억들이 있다. 낯선 호르몬 구이 가게에 앉아 거대한 소주병을 비우며 영업시간이 다 되도록 떠들어 댄 어떤 날, 즐거움을 못 이기고 들어간 음주가무의 가라오케(하이볼 잔을 두 번 정도 깨먹은), 홀로 치즈돈가스를 얹은 카레라이스와 맥주로 잔뜩 배를 채우고 산책했던 여름밤 오사카의 강변... 또 하늘에 구멍이 난 것 처럼 우르르 쏟아지던 태풍과 비, 습기에 익어 인간 교자만두가 되는 후쿠오카의 오후 두 시, 술에 취한 세븐일레븐 앞의 어느 밤, 알코올로부터 나를 계몽시키는 뒷골목의 거대한 바선생님. 잠에 들려는 순간 귓가를 맴도는 한여름의 모기는 또 어찌나 간지러운지.


니체는 그런 모기도 어쩌면(그렇다면 바퀴도 어쩌면?), 우리와 같은 파토스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 자기 내면에서 움직이는 세계의 중심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슬슬 세상이 많이 더워지고 있다. 유난히 뜨거운 여름날과 상관없다는 듯 풍기는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직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온도에서 분주히 꾸물대는 작은 생명들을 느끼는 일. 땡볕 아래 그늘막 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일도, 문을 열고 나오면 호흡을 가득 채우는 뜨끈한 열기도. 올해의 여름엔 어딘가로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지구를 찬란하게 키워내는 여름을 조금만 더 사랑해볼 순 없을까?


2022.06.22




뉴스레터 <막차>는 술을 사랑하는(사랑했던!) 두 사람, 

버드와 이저가 매주 보내는 가벼운 음주사담 뉴스레터입니다. 

더 많은 에세이와 콘텐츠는 뉴스레터에서!


뉴스레터 <막차> 이메일 구독은 여기로✍�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7692

이전 08화 혼자이고 싶은 보통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