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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저 Aug 23. 2023

무계획은 아직 오지 않은 미계획일 뿐

뉴스레터 <막차> 12호 백업 

처음 술자리를 갖는 이들이라면 꼭 한번씩 물어보게 되는 질문. 저기,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요즘 사람들이라면 절대 모를수가 없는 스몰토크의 주제다. 만일 자신의 MBTI를 모른다고? 당신의 줏대있음에 감탄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모임의 십중팔구는 16Personalities 사이트를 공유해주며, ‘지금 해봐! 넌 MBTI에 관심이 없으니까 ~STP 유형일지도 몰라.’ 라고 말할 것이다.)


오늘의 주제가 MBTI에 관한 고찰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세부적으로, J(계획형)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J와 P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은 미루어두고(내가 MBTI 전문가는 아니니), 아무튼간에 나는 J(계획형)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여행은 당연히 비행기, 숙소만 있다면 오케이. 즉흥적으로 갑자기 하고싶은 일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고, 오늘처럼 약속이 없는 날도 그냥 집에서 책을 읽을까, 영화를 볼까 한참을 고민하다 막차를 미리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카페로 노트북을 챙겨 나왔다.


J 100%의 이들에겐 슬픈 말이지만,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는게 없다. 이 말을 거의 신조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주로 머피의 법칙과 같은 이저-매직에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와 여행을 가본 친구들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을테지만, 계획은 단지 그날 저녁 어떤 메뉴를 어디서 먹겠다는 계획만으로 성사되지 않는다. 첫번째는 그 장소가 ‘그때 열려 있어야만' 가능하고, 두번째는 그 장소에서 그 메뉴를 ‘아직 팔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왜 꼭 계획된 장소에 가면, 하필, 어째서, 딱 그 날, 휴무를 하곤 하는지? 아무리 세세한 계획없이 떠난 여행이라지만, 너무 무심하게도 가게는 [휴무]라고 쓰인 채 우리를 반긴다. 당연히 이것만 있다면 오산, 가게 휴무 외에도 뉴욕 MoMA 리노베이션이나 해외 유원지, 미술관 월요휴무의 사례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참나무방패 소린처럼 모리아 광산의 문을 발로 차며 왜 열지 않는거야?!라며 화를 내며 돌아갈 수는 없는 일. (한동안 <호빗> 시리즈를 보는 바람에 이런 장면밖에 생각나지 않는 이저를 용서해주길.) 분명 신은 나를 향한 계획이 있다고 했는데(놀랍게도 이저는 크리스천임…) 때로는 사소한 배반이 나를 시험에 들게한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아무 계획도 없이 살아야하는걸까? 물론 우리는 늘 앞을 계획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진짜 계획 없이 살아가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계획의 반대는 무계획이 아니다. 그저 미계획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계획 실패에 좌절하며 별 수 없이 선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미계획’ 속의 선택이 신비한 우연성과 운의 영역에 내맡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별 수 없는 선택이 새로운 맛집을 발견하게 할 수도 있고, 성적에 맞춰 선택한 학과가 내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려던 카페가 만석인 참에 꾸역꾸역 찾아 들어간 오느 자리에서 이런 글을 써낼 수도 있는 것이고, 갑자기 꽂혀서 시작한 어떤 일(운동이든 글쓰기든간에)에서 새로운 기쁨에 휩싸여 있을 수도 있는 일. 오늘 하루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계획한 메뉴가 품절되는 바람에 시킨 다른 메뉴가 더 입맛에 맞는, 변변찮아 보이는 옆집이 실은 대화에 딱 들어 맞는, 미계획과 우연의 기쁨이 막차 독자 여러분에게 가득하길!


202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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