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8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기다림의 미학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by BYEOT Apr 28. 2024
아래로

남동생과 내가 함께 있으면 엄마는 사과를 깎다가 꼭 과도를 나에게 넘겼다. "예쁘게 깎을 줄 알아야 나중에 시부모님에게 사랑받지" 새로운 걸 배우는 일에 곧잘 흥미를 가지던 나도 순식간에 짜게 식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엄마가 나중에 사랑받으려면 알아야 한다 말할 때마다 한 마디도 안 지고 덧붙였다. "그냥 내가 스스로를 잘 대접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서 알려주면 안 돼? 과일은 꼭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잘 깎아야 하는 건가"


낡은 이유를 덧붙여 흘려들은 엄마의 살림 비법은 기어코 어깨너머로 알게 된다. 살림은 일상이니까. 이따금 도자기 그릇은 삶아야 뽀얘지고, 가스 후드와 음식물 쓰레기를 잘 관리해야 부엌이 청결해진다는 것들. 이밖에도 살림은 돌아서면 또 쌓여 있고, 해도 해도 잘 티가 안 난다는 것까지 말이다. 빨래와 설거지에는 또렷한 공통점이 있다. 기다림과 화합물의 아름다운 결과물이란 거다.


처음 냄비를 태웠을 땐 탄 자국이 신경이 쓰여서 하루종일 붙잡고 벅벅 문질렀다. 까맣게 탄 냄비를 당장 해결하고 싶었지만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탄 냄비는 베이킹 소다와 식초를 넣고 팔팔 끓인 후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벗겨진다. 빨래도 마찬가지다. 하얀 티셔츠에  불가항력으로 튄 새빨간 김치 자국은 세탁기에 넣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녀석도 베이킹소다와 식초로 지워내야 한다. 그래도 자국이 남아 있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햇빛에 바짝 말려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 싱크대 아래 수납장에는 베이킹소다, 구연산, 과탄산소다가 떨어진 적이 없다.


여전히 엄마 집에 가면 낡은 살림살이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따금 금이 간 수납장 위로 가지런하게 올려진 물건을 보면 마음이 저릿할 때가 있다. 엄마가 다이소에서 사 붙여놓은 천 원짜리 스티커도 투박하지만 예쁘다. 아마도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면, 엄마는 지금보다 더 고상한 취향으로 집을 가꿨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집을 보면 한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던가. 요즘도 나는 텁텁한 된장찌개와 밍밍한 미역국에 더할 한 스푼의 양념을 알기 위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의 비밀에 대해서도 웬만해서 다 알고 있다.




일요일 연재
이전 10화 당신의 부엌은 안녕하신가요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