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 Apr 21. 2024

당신의 부엌은 안녕하신가요

여백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은 바람.


집에서 가장 독특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건 전자레인지다. 이따금 가전을 사용하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순간에 구구절절 사연을 읊게 되는 비밀스러운 곳에. 먼저 전자레인지를 쓰고 싶다면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야 한다. 다음엔 싱크대 상부 수납장을 열고, 멀티탭을(두 개를 연결해 둔 것을) 내려 전원을 켠다. 데울 음식을 머리 위로 들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의자 밑으로 내려와 기다린 후 동작을 반복해 정리한다.


다시, 변명을 시작하자면 좁은 공간의 부엌에서 기이한 곳에 위치한 전자레인지는 선택 밖의 일이다. 주방 가전을 티비장 위나 신발장 앞 혹은 침대 방에 두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나의 커다랗고 못생긴 전자레인지는 동생에게 물려받았다. 학교를 외각으로 다녔던 동생이 급하게 산 가성비 제품은 그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내게로 왔다. 전자레인지는 이사를 올 때부터 4년 내내 늘 한 자리에 있는데, 청소라도 할라치면 이를 들고 내리면서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 덕분에 웬만해서는 전기보다는 물을 끓여 데우는 식으로 극적 타협이 이뤄지고 있다.


바야흐로 갓 태어난 독립러의 살림법은 부모에게서부터 올 수밖에 없다. 식기 정리와 음식물 쓰레기 관리부터 부엌살림이 시작된다. 반면 조리대가 넓은 본가에서는 웬만한 식기들을 건조대에 그대로 말린 후 사용했는데, 나는 간헐적으로 그릇장에 말린 식기를 차곡차곡 정리한다. 좁은 부엌을 간결해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음식물 쓰레기를 무게로 달아 버리는 본가와 달리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가장 작은 1L와 그보다 큰 3L 두 가지를 쓰고 있다. 평소에는 작은 봉투를 사용해 그때그때 처리하고, 찌개나, 과일 껍질 등 굵직한 쓰레기가 나올 때는 비교적 큰 봉투를 사용한다. 덕분에 혼자 살면서 단 한 번도 벌레가 생긴 적이 없다. 역시 그때그때 버리기가 답이다.


사람들이 우리 집 부엌을 보며 답답해하는 건 놀라울 정도로 아날로그식을 고집해서다. 우리 집에는 그 흔한 에어프라이기나 믹서기, 커피 머신이 없다. 내돈내산으로 비치한 가전은 물을 끓일 수 있는 포트뿐이다. 물건 하나를 고를 때 허투루 하지 않는 내가 찾는 포트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덤벙거리는 나를 위해 겉 면은 플라스틱일 것. 2 관리하기 쉽게 안쪽은 스테인리스 100% 일 것. 3 청소를 위해 하나의 넓은 통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 4 뚜껑과 본체가 연결되어 있을 것. 5 물이 끓으면 자동으로 꺼질 것. 꽤 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포트 찾기는 약 2주 넘게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기어코 찾은 3만 원대 포트를 4년째 아무 불만 없이 잘 쓰고 있다.


줄이고, 또 줄여서 마련한 식기와 주방용품은 매번 수납공간보다 넘친다. 이따금 인스타그램에서 오븐을 활용한 레시피를 보면 '꼭 해보고 싶다....' 의지가 활활 타오르지만 이미 꽉 찬 수납장을 보곤 금세 수그러든다. 오늘 나의 집에선 가성비 좋은 가전으로 집을 꾸역꾸역 채워 넣기보다 분수에 맞게 살기로 했다. 여전히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한 건 1평. 즉 공간이다.




이전 09화 아직 첫 번째 집에 삽니다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