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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Apr 28. 2024

기다림의 미학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남동생과 내가 함께 있으면 엄마는 사과를 깎다가 꼭 과도를 나에게 넘겼다. "예쁘게 깎을 줄 알아야 나중에 시부모님에게 사랑받지" 새로운 걸 배우는 일에 곧잘 흥미를 가지던 나도 순식간에 짜게 식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엄마가 나중에 사랑받으려면 알아야 한다 말할 때마다 한 마디도 안 지고 덧붙였다. "그냥 내가 스스로를 잘 대접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서 알려주면 안 돼? 과일은 꼭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잘 깎아야 하는 건가"


낡은 이유를 덧붙여 흘려들은 엄마의 살림 비법은 기어코 어깨너머로 알게 된다. 살림은 일상이니까. 이따금 도자기 그릇은 삶아야 뽀얘지고, 가스 후드와 음식물 쓰레기를 잘 관리해야 부엌이 청결해진다는 것들. 이밖에도 살림은 돌아서면 또 쌓여 있고, 해도 해도 잘 티가 안 난다는 것까지 말이다. 빨래와 설거지에는 또렷한 공통점이 있다. 기다림과 화합물의 아름다운 결과물이란 거다.


처음 냄비를 태웠을 땐 탄 자국이 신경이 쓰여서 하루종일 붙잡고 벅벅 문질렀다. 까맣게 탄 냄비를 당장 해결하고 싶었지만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탄 냄비는 베이킹 소다와 식초를 넣고 팔팔 끓인 후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벗겨진다. 빨래도 마찬가지다. 하얀 티셔츠에  불가항력으로 튄 새빨간 김치 자국은 세탁기에 넣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녀석도 베이킹소다와 식초로 지워내야 한다. 그래도 자국이 남아 있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햇빛에 바짝 말려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 싱크대 아래 수납장에는 베이킹소다, 구연산, 과탄산소다가 떨어진 적이 없다.


여전히 엄마 집에 가면 낡은 살림살이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따금 금이 간 수납장 위로 가지런하게 올려진 물건을 보면 마음이 저릿할 때가 있다. 엄마가 다이소에서 사 붙여놓은 천 원짜리 스티커도 투박하지만 예쁘다. 아마도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면, 엄마는 지금보다 더 고상한 취향으로 집을 가꿨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집을 보면 한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던가. 요즘도 나는 텁텁한 된장찌개와 밍밍한 미역국에 더할 한 스푼의 양념을 알기 위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의 비밀에 대해서도 웬만해서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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