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예술가로 태어난다
나는 시작을 참 잘한다. 대신, 포기도 참 빠른 편이다. 누군가 어떤 취미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름과 동시에 내 손은 어느새 휴대폰을 열어 관련 검색어를 입력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는지, 필요한 장비나 비용은 얼마나 되는지 등 정보를 알아낸다.
블로그와 유튜브의 출현으로 그야말로 정보가 넘치는 시대. 누군가에게 물어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니 나의 실행력은 더욱 가속이 붙었다. 그렇게 나를 스쳐간 취미는 다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쌓여 갔지만, 호기심 하나 해결을 위해 시작했던 것들 중에는 10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취미들도 여럿 있으니 시간 낭비, 돈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직접 경험해보는 시간을 통해 나에게 맞는 취미를 찾을 수 있었고 지금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활력소가 되었다.
대학원까지 수학을 전공 한 내가 어떻게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시작점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난다. 그림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동안 나를 거쳐간 수많은 취미를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매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도 한번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라는 생각은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그림이라는 것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타고나거나 배워야만 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영역이라 생각했다.
미대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은퇴 후 느지막이 시작한 그림을 오랜 취미로 삼아 이젤 위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멋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세상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라도 있어야 "나도 한번 그림을 그려볼까"할 텐데 그러기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수년 동안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성적표로 평가받아 오면서 그림에 대한 새로운 궁금증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미술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렴풋하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미술 선생님께서 하라고 시킨 것에 대치되는 방향으로 성의 없게 그림을 그려 일부러 낮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는 호기심은커녕, 내 손은 똥 손이라는 확신만 가득한 채로 나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누군가에게 평가받고 숫자로 결과를 통보받으면서 그림 그리기를 싫어하는 어른으로 자라온 듯 하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나는 분명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잘 그리지는 못했지만 남동생의 미술 숙제를 대신해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내가 그린 그림을 액자로 만들어 주신 부모님 덕분에 어릴 적 내 방 커다란 책장 위에는 그림 액자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점수로 그림을 평가 받던 학교 미술 시간을 싫어하고 내 손은 똥 손이라고 확신하며 자란 내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나 스스로가 신기한데 내 주변 지인과 가족들이 느끼는 의아함은 오죽할까. 신기한 눈빛 가득 머금고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 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곤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알게 된 창작의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리고 마음만 있다면 당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는 생각에, 나의 시작점을 이야기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곤 한다.
2018년은 내 전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고 우울했던 암흑기다.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꺼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려고 한다. 간략하게 써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보다 자세하고 친절하게 내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는 더 편안한 시기가 오지 않을까 바라본다.
아무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를 억지로 끌어당기며 살던 그때, 내 메신저의 상태 메시지에는 "비행기 모드"라고 적고 "말 걸어도 소용없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만든 동굴 속에 숨어 있었다. 나에게 연결되는 모든 것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나를 고립시켰다.
내가 하루를 보내며 유일하게 했던 것은 책을 읽는 일이었다. 여느 날과 똑같이 책을 읽다가 문득 좋은 문장을 기록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개월째 무기력한 상태로 책만 읽던 내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캘리그래피였다.
필요한 준비물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배송이 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유튜브에서 캘리그래피 영상을 찾아보면서 종이에 쓰는 캘리그래피도 있지만 아이패드로 할 수 있는 디지털 캘리그래피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최신 기종으로 바꾼다며 나에게 방치해버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로 수개월째 그대로 놓여 있는 아이패드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 쓸모없이 방치된 애물단지 아이패드가 드디어 제 몸 값을 하기 위해 내 손에서 새롭게 태어나던 순간이다.
캘리그래피 역시 배워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패드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 당장 필요한 앱을 설치하고 책 속에서 찾은 문장을 써보았다. 두문장 정도 쓰고 나니,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부터 나는 매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고, 동시에 나의 캘리그래피는 이 두문장에서 끝이 났다. 원하지 않는 그림을 그려 내야만 했던 학창 시절의 미술 시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런 목표도, 기대도 없었지만 그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좋았고 그리기에 몰두 해 있는 내가 좋았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게 된 시작점을 구구절절 설명했음에도, 여전히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것을 안다. "어느 날, 갑자기"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아니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지만 타고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히 "어느 날, 갑자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하고 싶다. 마음속으로 막연히 "무언가를 하고 싶다, 누군가처럼 나도 되고 싶다" 생각했던 것을 지금 바로 해보면 그것이 바로 "어느 날, 갑자기"가 되는 것이다. 꾸준하게 지속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서른 살을 앞둔 시점에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스왈로스의 1번 타자 데이브가 2루타를 날린 순간 불현듯 자신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날 밤부터 가게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
미술계 동료나 스승이 없는 내가 영혼의 멘토라 생각하며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번도 소설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글쓰기 교육을 받아 본 적 없던 그가 야구 경기를 보다가 불현듯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고 집으로 돌아와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듯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후 꾸준하게 글을 쓰며 대중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작가가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만, 시작이 있어야 지속도 있는 것이니 지속에 대한 부담감으로 시작을 미루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일단 시작을 해보아야 내가 지속할 수 있는 일인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궁금증을 해결해 나가며 새로운 일에 도전했던 경험들이 원동력이 되어 내 인생의 여정은 계속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으로 무엇인가에 도전하는 열정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내 인생에 일어난 대부분의 사건들은 호기심 해결을 위해 시도해 보았던 경험들이 모여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곤 했다. 나이가 들더라도 호기심 많은 할머니로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갖고 싶다.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도
예술가로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 파블로 피카소 -